과학철학과 인식론의 접점을 수립하는 새로운 시각
상태바
과학철학과 인식론의 접점을 수립하는 새로운 시각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4.06 13: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경험적 합리성의 해체와 재건: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경험론적 접근 | 윤보석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408쪽

 

우리는 흔히 ‘지구는 둥글다’, ‘철이 녹스는 것은 산소와의 작용 때문이다’와 같은 통상적인 과학적 주장들, 즉 일상적 견해들을 참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신뢰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 즉 경험 자료가 과학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학 이론에 대한 신뢰의 원천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경험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합리성은 곧 경험적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콰인, 데이비드슨, 셀러스, 비트겐슈타인, 굿맨 등 저명한 철학자들이 공히 ‘경험에 주어진 순수한 진리’에 대해 대대적인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경험의 인식론적 역할은 ‘소여의 신화’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이었다. 이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중재할 경험의 인식론적 권위에 손상을 가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의식 경험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증대하고, 더불어 독단론, 선언주의, 직접적 실재론 등 경험의 인식론적 역할을 복구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경험적 합리성은 복원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적 합리성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은 애당초 그에 대한 비판이 담지하는 올바른 통찰을 수용하고 있는가? 도리어 기존 옹호 방식의 잘못된 전제를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통상적인 과학적 주장들을 적절히 옹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명암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토머스 쿤의 과학관을 출발점으로 삼아, 과학에 대한 일상적 견해가 기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살펴본다. 저자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경험적 합리성에 대한 창조적 파괴를 제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잘못된 접근을 해체하고 새로운 복원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일상적 견해에 적대적인 듯 보이는 쿤의 과학관이 오히려 그것을 옹호하는 통찰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쿤의 견해는 경험적 합리성의 파괴가 아닌 재건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쿤 이후의 바람직하지 않은 과학철학 내의 비경험론적 경향들, 그리고 경험적 합리성을 복원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이 지닌 한계들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과학적 합리성의 개념과 의미를 소개하고, 토머스 쿤의 과학관이 전통적 모델을 지적하고 부정함으로써 패러다임 전환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고취한다는 것을 보인다. 즉 쿤의 주장이 과학적 합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특정한 이해(전통 철학자들의 방식)에 반항하며, 오히려 과학적 합리성을 수정 · 재건하려는 지향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통적 인식론에 기반을 둔 주류 과학철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성 개념을 대체할 대안적 합리성 개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2장과 3장에서는 쿤의 과학관과 양립가능한 새로운 과학적 합리성 개념을 ‘쿤의 과제’로 보고,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쿤 자신이 새로운 과학적 합리성의 윤곽에 대한 시사점을 남기고 있고,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후속 논의가 과학철학에서도 진행되어왔음을 인지하며, 쿤 자신의 답변과 그의 영향을 받은 과학철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한다. 특히 2장에서는 라우든의 ‘그물망형 정당화 모델’을 중심으로, 3장에서는 조인래의 해결책을 중심으로 각각의 논의를 검토한 후 문제점을 살펴본다.

4장과 5장에서는 이론-관찰 간 상호의존성에 기반을 둔 경험의 인식적 역할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패러다임 전환(과학혁명)의 합리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며, 정상과학이 과학혁명보다 근본적임을 짚는다. 4장에서는 관찰의 이론적재성이 경험의 인식적 역할과 인식적 합리성의 보존에 방해가 된다고 보는 맥락상대적 토대론이나 비순수정합론을 비판하고, 오히려 그것이 경험적 합리성을 가능케 하는 요인임을 주장하며, 이와 같은 태도 변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나아가 5장에서는 인식적 선언주의, 독단론, 직접적 실재론 등 경험의 인식론적 역할을 복구하려는 철학적 논의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6장과 7장에서는 경험의 정당화가 세계관에서 지각 믿음으로의 전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가정적 소여 개념을 소개한다. 가정적 소여에 기반을 둔 경험적 합리성 개념이 패러다임 전환의 합리성과 관련하여 전통적 인식론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제공함을 짚는다. 저자는 이것이 쿤의 과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해결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핀다. 즉 ‘가정적 소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경험론’이 쿤의 과제에 대한 가장 만족스러운 해결책임을, 또한 역으로 쿤의 과학관은 이러한 가정적 소여를 뒷받침하는 추가적 근거가 될 수 있음을 관철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