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가부장 중심에서 탈구된 목소리들…“비판적 4‧3 연구”가 포착한 음각陰刻의 서사敍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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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가부장 중심에서 탈구된 목소리들…“비판적 4‧3 연구”가 포착한 음각陰刻의 서사敍事
  • 고성만 제주대·사회학
  • 승인 2024.03.3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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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엮은이의 말_ 『비판적 4·3 연구 2: 속삭이는 내러티브』 (고성만 엮음, 장은애·허민석·송혜림·고성만·김상애 지음, 한그루, 344쪽, 2024.03.)

 

“비판적 4·3 연구” 시리즈는 집단적 학술 운동으로는 최초의 시도였던 『제주 4·3 연구』(역사문제연구소 외, 1999, 역사비평사)의 시대 정신과 책무 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과거청산’이나 ‘완전한 해결’로 환유되는 현실과의 불화(不和)를 꾀하고, 비판적 시각과 목소리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기획됐다. 『제주 4·3 연구』가 닦아 놓은 토대 위에 서 있기는 하나, 동시에 그것의 경계와 한계를 의식하며, 구조와 체계를 문제시하고 사각(死角)을 찾아냄으로써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마냥 휩쓸리지 않도록 반작용을 꾀하려는 실천이다.

『속삭이는 내러티브』는 지난해(2023년)부터 시작한 “비판적 4·3 연구”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화산도』의 여성주의적 독해: 4·3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장은애)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재일제주인 여성의 재현을 살핀 「희생자의 얼굴 너머: 4·3 다큐멘터리 영상과 재일제주인 여성」(허민석) ▲여성의 4‧3 증언에서의 침묵을 통해 그 공백을 읽어나가는 「증언-공백으로 읽기: 여성의 기억이 말해질 때의 침묵에 대하여」(송혜림) ▲‘친족지의 정치’로서 학살 이후 친족집단 기록의 양상을 살핀 「학살 이후의 친족지(親族誌): 친족지(親族知)의 생성과 실천」(고성만) ▲부계 혈통 중심주의에서 탈구됨으로써 ‘가족관계 불일치’를 경험하는 이중 희생자로서의 ‘딸’들의 자리를 묻는 「아버지의 기록, 딸의 기억: 4·3과 딸의 가족사」(김상애) 등 문학과 영상, 증언과 기록, 여성과 가족‧친족에 관한 다섯 편의 글을 모았다. 

필자들의 연구는 제주 4·3 특별법(2000년)에 토대를 둔 과거사 해결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으로 정착되는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더 말이 없는”(이산하, 2018, 『한라산-이산하 장편서사시』, 노마드북스) 시대를 지나 많은 말들이 사방에서 분출하는 시대. 경험 또는 관계를 터부시하는 시선과 억압을 피해 말을 숨기거나 비트는 시대가 아닌, 당당한 말들이 넘쳐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한 환경에서 필자들은, “연구가 나에게, 4·3에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자기 반영적 질문을 구체화하고 4·3(의 유산)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익히며 각자의 자리에서 고뇌와 성찰을 거쳐왔다. 최근에는 ‘청산’과 ‘해결’이 임박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면서 법과 제도, 정책의 변화, 그에 따른 사람들의 태도와 감정을 냉철히 관찰하고 분석해야 할 문제의식도 시야에 넣게 됐다.

4·3 연구의 질문이 동시대성을 갖추되 당대적 요청에 비판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점은 필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신냉전적 질서 속에 빚어지는 갈등과 충돌의 한복판에서 제주 주민들의 자기 결정권이 위협받을 때마다 4·3의 경험과 기억이 소환되지만, 4·3 연구가 유리관 밖으로 나와 현실의 문제에 응답하기를 요청하는 연대의 목소리에 무응답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럴수록 4·3 연구의 질문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혹은 예견되는 현상과 관계를 맺고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데 필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각자의 영역에서, 4·3의 경험과 기억, 유산을 현대세계의 다종다양한 사회문제와 접합시키기 위한 질문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비판적 4·3 연구 2: 속삭이는 내러티브』가 문학과 영상, 증언과 기록, 여성과 가족·친족에 관한 글로 엮이게 된 것은 포스트 ‘희생자’ 시대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 자체로 시대상을 반영하는 현상일지 모른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을 행위자로 하는 학살 이후의 세계가 각 장마다 등장한다는 점에서, ‘여성’은 이번 “비판적 4·3 연구”의 공통된 관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때로는 그러한 목소리로 인해 더 들리지 않게 되고, 여러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여 존재를 발견하고 전파를 모색하는 때이지만, 필자들의 관심은 단순한 수집과 전시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내셔널리즘,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성, 신고주의와 실증주의, 인정투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같은 ‘청산’과 ‘해결’을 지탱해 온 논리와 거기에 번롱되는 그녀들의 역사와 현실, 연대와 저항 가능성에 대한 비평적 분석을 추구한다. 그 점에서 필자들의 문제의식은 ‘청산’, ‘해결’ 담론과 긴장을 일으키며 팽팽하게 맞선다.

지난해 『비판적 4·3 연구』 서문에서 밝힌 “알량한 자존심과 능력 부족으로 변변찮은 고료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은 올해도 개선되지 못했다. 한편 다른 마음으로는, 공적 자금의 지원 없이는 운동도 연구도 채택되지 못하고, 그래서 발견도 되지 못한 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보란 듯이 책을 엮어 독자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필자들의 헌신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필자들은 두 번째 “비판적 4·3 연구”의 방향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폭염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에 모여 원고를 같이 읽고 수정 방향을 구상했으며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고쳐쓰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초출(初出)에서 짧게는 2천 자, 많게는 2만 자를 추가로 집필했고, ‘에필로그’와 ‘필자 소개’도 새롭게 덧붙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시야는 여전히 협소하고 분석 또한 서툴다. 다각적인 접근을 개척하는 데 독자들의 조언을 청한다.

무크지 형식으로 기획된 “비판적 4‧3 연구”는 앞으로도 날카로운 비판과 그에 기반한 공고한 연대를 지향하며, 젊은 연구의 장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4‧3 연구의 길을 열어나갈 계획이다.

 

고성만 제주대·사회학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제주 4·3 특별법 제정 직후의 많은 변화 속에 20대를 보냈지만, 연구자의 사회적 책무와 쓸모를 인식하게 된 건 법과 제도, 의제에서 제외된 혹은 어느 틈새에 끼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후유장애인’ 불인정자, ‘희생자’ 제외 대상자…. 박사과정에서는 오키나와전, 대만2·28사건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국가별, 지역별 특수성이 반영된 ‘희생자’와 제외자들을 만났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희생자’의 폴리틱스: 제주4·3/오키나와전/대만2·28 역사청산을 둘러싼 고뇌(〈犠牲者〉のポリティクス: 済州4·3/沖縄/台湾2·28 歴史清算をめぐる苦悩)』(2017, 京都大学学術出版会)에 썼다. 각지에서 경험을 문장으로 정리하고 처지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난처해 하셨던 분들의 구술을 대필하며 ‘희생자’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함께 나눈 궁리의 시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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