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의심 학술지 게재 실적, 과제 평가 결과에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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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의심 학술지 게재 실적, 과제 평가 결과에 반영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3.3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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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일부 한국연구재단 지원과제를 신청하거나 수행하는 연구자가 부실 의심 학술지에 실은 논문을 실적으로 제출한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20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은 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초연구사업 과제 공고문에 '연구(책임)자가 부실 의심 학술지에 게재한 실적이 과제 평가 결과에 반영될 수 있음'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과제 선정과 단계별 평가, 최종 평가 절차에서 연구자가 부실 의심 학술지에 게재한 실적을 올린 것이 확인되면 이를 감안해 평가하겠다는 것을 ‘부실학술활동 예방을 위한 권고사항’으로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가 연구재단 지원과제의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할 때 학계가 신뢰하기 어려운 학술지나 학술대회를 배제하라는 권고라 할 수 있다.

부실 의심 학술지는 기존 학술지처럼 동료심사 등 엄격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게재료만 내면 쉽게 논문을 실어준다는 의혹을 받는 학술지다. 이들 학술지는 연구 완결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도 실어주거나 한 번에 수백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논문 수로 실적을 평가받는 연구자들을 유혹해 영리 활동을 이어가면서 연구 윤리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부 대학에서 이를 연구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 자정 노력이 이어졌지만, 연구재단은 특정 학술지를 부실 의심 학술지로 지정하지 않는 대신 지난해 '건전한 학술생태계 구축을 위한 캠페인'을 실시하며 학계 차원의 자정을 촉구하고 직접 대응엔 나서지 않아 왔다.

하지만 이번에 직접 대응에 나선 것은 부실 의심 학술지의 국내 학계 잠식이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연구재단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분석에 따르면 연구재단 R&D 지원을 받은 과학기술인용 색인(SCI) 급 논문 중 부실 의심 학술지 게재 논문은 2017년 7.7%에서 2022년 19.2%로 늘었다.

특히 논문 대량 발표와 짧은 동료심사 기간으로 학계로부터 부실 의심 학술지란 의심을 끊임없이 받는 스위스 출판기업 'MDPI'의 발간 학술지들의 경우 국내 SCI급 논문 점유율이 2017년 2.76%에서 2022년 17.8%까지 늘어난 상황이다. 

 

□ MDPI는 동료 심사가 40일에 불과하고 매년 발표하는 논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부실 의심 학술지란 학계 비판을 꾸준히 받고 있다. 허정 한국연구재단 책임연구원과 남기곤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 등 연구팀은 지난해 10월 학술지 '한국경제포럼'에 발표한 논문 「누가 MDP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을까?: 2018~2020년 한국 대학 교수들의 논문 실적에 대한 분석」에서 MDPI 학술지를 사실상 '부실의심학술지'로 규정했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MDPI 학술지들은 빠른 심사 절차와 특별호 제작을 통해 대량으로 논문들을 출판하고, 논문 저자들로부터 투고료를 받는 비즈니스 모델을 취하고 있다. 연구 실적 압박을 받는 연구자들에게 스팸 메일을 보내 투고를 유도하고, 수백만 원가량의 투고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KRI 시스템에 등록된 논문과 연구자 5만5천136명 데이터를 결합해 어떤 연구자들이 주로 MDPI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지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국내 대학 소속 연구자들이 MDPI에 투고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SCI급 논문 대비 MDPI 논문 비중은 5.4%에 불과했으나, 2020년에는 17.6%로 확대됐다. 

부교수와 조교수와 같이 승진 압력이 존재하는 경우, 그리고 BK 사업에 참여하여 연구 실적에 대한 요구가 강한 경우 MDP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성향이 보다 강했다. 반면 대학 특성별로는 연구 능력이 일정 수준 이상인 대학에서는 MDPI 학술지 논문 게재 성향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고, 특히 과학기술원의 경우 MDPI 학술지 의존 성향이 유의하게 더 낮았다. 

MDPI 학술지 논문 수가 승진 확률에 미치는 효과를 분석해보면, MDPI를 제외한 SCI급 논문보다는 절대값이 다소 적었지만, KCI급 논문과 유사한 정도의 플러스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추세와는 달리 과학기술원의 경우에는 MDPI 학술지 논문 수가 승진에 미치는 효과가 유의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수치를 보면, 국내 교수들은 이 기간 총 2.92편 논문을 발표했으며, 과학기술인용색인(SCI)급 논문에는 1.19편, MDPI에는 0.13편을 발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SCI급 논문 대비 MDPI 학술지 논문 비율은 10.5%로 나타났는데, 정교수의 경우 9.4%지만 부교수는 10.1%, 조교수는 13.3%로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다른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 BK사업에 참여하는 교수와 아닌 교수를 비교했을 때 BK 참여 교수는 MDPI 논문을 싣는 확률이 3.7%~3.9% 포인트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이 MDPI 논문이 한 편 증가했을 때 교수의 승진 확률을 분석한 결과 2.3% 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SCI급 논문이 3.5% 포인트 높이는 것과 비교하면 낮지만, 국내 주요 논문들을 모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급 논문인 2.3% 포인트와는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런 효과들이 SCI급 논문을 더 많이 발표하는 주요 대학이나 4대 과학기술원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팀은 "교수가 논문을 게재할 학술지를 선택할 때 경제적 유인이 작용할 수 있고 소속 기관의 문화나 풍토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MDPI는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서도 논문 실적이 필요한 연구자들에게 수백만원의 게재료를 받고 빠르게 논문을 발표해주는 모델을 통해 급성장하고 있다. MDPI는 2017년 3만1천여 건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2022년 28만8천여 건의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주제를 빠르게 낼 수 있는 특별 호 논문을 일반 호 논문 대비 3배 늘리는 등 부실 문제가 지적된다.

여기에 50% 이상 할인 혜택을 부여하면서 공격적으로 영업에 나서고, 심사자가 게재 거절 판정을 내려도 논문이 그냥 출판되는 사례도 나오는 등 국제적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 현재 학계에서는 MDPI 학술지가 부실의심학술지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MDPI가 전통 학술지들과 달리 누구나 장벽 없이 학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 액세스'(Open Access)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보니, 부실의심학술지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 돈만 내면 무조건 논문을 승인하고 출판해주는 '약탈적 학술지'와 달리 MDPI의 논문 채택률은 50%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재단도 명확하게 MDP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연구자를 제재하겠다는 방침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재단 관계자는 "재단 내부적으로 부실 의심 학술지 명단을 갖고 있거나, 이를 일괄 적용해 연구자를 평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예를 들어 MDPI에서 나오는 학술지 중에서도 일부 학술지는 학계에서 인정받는 사례도 있는 만큼, "어떤 학술지가 부실 학술지인지는 연구자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연구재단은 부실 의심 학술지 지정이 연구계 자율성을 해치는 만큼 직접 특정 학술지를 지정하지는 않는 대신 과제를 평가하는 다른 연구자들이 실적으로 나오는 학술지를 보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연구재단의 이번 방침은 올해 2조1천179억원 규모로 조성된 기초연구사업에 우선 적용되며, 향후 다른 사업으로 확대도 검토되고 있다.

현재 기초연구사업은 4월 과제 선정을 목표로 평가를 진행 중인 상황으로, 여기서 처음 부실 의심 학술지 게재 실적을 평가한 결과가 나올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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