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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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지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3.30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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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타利他와 시여施與: 조선 후기 문학이 꿈꾼 공생의 삶 |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92쪽

 

이 책은 자기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여施與’라는 조금은 낯선 개념을 주제로 한 다양한 조선 후기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타란 이타적 행위를 말한다. 이타적 행위는, 행위 주체가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감내하면서 타자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다. 자기손실의 양상과 범위는 대단히 다양하고 넓다. 재화나 노동력의 감소, 시간이나 기회의 상실, 나아가 신체·생명의 희생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흥부전>에서 흥부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 준 행위는 시간과 노동을 소모한다. 이때의 자기손실은 아주 가볍다. 하지만 <심청전>에서 심청은 아버지 심학규의 개안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 생명의 희생은 자기손실의 극한이다. 이처럼 자기손실은 다양하고 그 범위도 넓다.

심청은 자기손실에 상응하는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흥부도 마찬가지다. 이타적 행위의 주체는 보상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타적 행위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다. 기억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타작 행위 주체의 ‘보상 기대 부재’, ‘자기망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보상이 이루어진다.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준 박씨로부터 재화를 얻었고 심청은 되살아난 뒤 황후가 되어 눈을 뜬 심학규와 재회한다.

<흥부전>과 <심청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타-보상 구조를 갖는 작품은 드물지 않다. 이 책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문학작품, 특히 조선 후기 문학작품에서 이타적 행위와 그것에 대한 보상이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 또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아가 왜 조선 후기에 이타-보상을 구조로 하는 작품이 양산되고 유통되었는지 그 역사적 근거를 따진다.

이타적 행위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경우는 경제적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돕기 위해 자기 소유의 재화를 일방적으로 양여하는 것이었다. 재화의 일방적인 양여를 과거 문헌에서는 ‘시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비문이나 묘지, 전(傳), 행장 등 개인의 생애를 형상화하는 산문 장르는 인물을 기릴 때 시여를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시여는 전근대 사회에서 존중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미덕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전 재산을 성균관에 남긴 여류 부호 ‘두금’, 사람들의 감사 인사마저 꺼려 시장에도 가지 않은 천의賤醫 ‘응립’, 공금을 유용하고도 처벌을 면한 유협遊俠 장복선 등 잊혔던 인물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이들이 어떻게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권선징악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옛이야기 향취가 난다.

이 책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조선 후기의 문학작품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도 있고, <베트남에 간 역관>과 같은 생소한 작품도 있다. 이 작품들을 ‘이타’와 ‘시여’라는 핵심어로 분석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작품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는 역사 또한 놓치지 않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끌어낸다. 조선 왕조의 정통을 바로잡는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때 명의 원병을 끌어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역관 홍순언의 선행을 꼼꼼히 살핀 대목이 대표적이다. 지은이는 《대명회전》 등 중국 사료까지 살펴 홍순언의 은혜를 입은 애첩 때문에 명의 예부시랑 석성이 두 사안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허구임을 밝혀낸다. 지은이에 따르면 종계변무를 도운 인물은 허국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문학서일 뿐 아니라 역사서라 하는 이유이다. 

책은 단순한 문학 그리고 역사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흉작으로 인한 기근, 대책이 없었던 질병의 유행, 백성들을 쥐어짜는 학정에 시달리던 민중이 ‘더불어 살기’ 위한 해결책으로 이타-보상담이 만들어지고 유포되었음을 짚는다. 또한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손해를 무릅쓰는 ‘자기손실’, 베풂에 대한 보답을 전혀 바라지 않는 ‘보상 기대 부재’, 자신이 베풀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자기망각’이 남을 돕는 행위의 필수 요소임을 지적한다. 과일과 말총의 매점매석으로 거금을 번 허생이 결국 토지를 잃은 농민들에게 땅을 돌려주고, 나가사키의 기민飢民을 위해 곡물을 실어 나르는 이야기 등을 통해 비윤리적인 부는 징치되어야 하고 그 부는 분배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책 말미에 던지는, “이기적 욕망에 기초한 화폐의 부단한 축적과 제한 없는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건 없는 증여를 기초로 공생을 지향하는 이타적 행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은이가 진정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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