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근원’…지식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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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근원’…지식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는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3.30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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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인된 지식: 우리는 최초의 지식을 어떻게 획득했는가 | 조르조 발로르티가라 지음 | 김한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쪽

 

이 책은 뇌과학자들의 오래된 질문이자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 ‘지식의 근원’을 밝힌다. 저자는 병아리의 각인에서 신생아의 첫 동작까지, 그동안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온 ‘선천적 앎’을 과학의 관점으로 풀어나간다. 최초의 지식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유력한 단서, ‘각인’ 현상으로 출발해 척추동물과 인간의 뇌로 연구 영역을 확장했다. 한 분야를 개척한 노련한 학자의 랩에서 이루어지는 실험 설계는 그야말로 과학적 상상력의 집합체가 된다.

저자가 골몰한 연구는 선천적 앎을 정의하고, 뇌 속에 깊숙이 자리한 각인된 지식의 진화 과정을 밝혀내는 것이다. 본능이라고 여겨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던 영역을 세분화해낸 저자의 작업은 ‘지식’에 대한 논의를 확장했다는 의미 역시 크다고 볼 수 있다. 급진적이라 평가되었던 저자의 이론 즉,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생물학적으로 각인된 지식은 모든 척추동물의 뇌에 존재한다’라는 논제가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기까지는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40여 년간 이어진 저자의 연구 역사가 있었다. 

이 책의 특징은 ‘인지’와 ‘정서’의 발판을 밝히는 행동 실험을 설계부터 결과, 해석까지 첨예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과학자의 연구 방식은 그 자체로 질문에 대한 답이자 근거가 된다. 의문을 떠올리고, 가설을 세우고, 무수한 변수를 조절해가며 실험을 구성하고, 명확한 근거를 쌓아 증명하는, 치열한 검증 과정은 많은 이에게 과학자의 무궁무진한 호기심, 창의성이 어떤 것인지 생생히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그날그날 수행한 실험을 말하듯이 기록한 ‘과학자의 연구 노트’로도 읽을 수 있다. 

지식이라 하면 막연히 후천적으로 배우거나 경험해 습득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신생아나 병아리 등 생명체들은 태어나자마자 분명하게 ‘아는’ 것들이 있다. 그 배우지 않은 앎을 분석하면 처음 도착한 세계에서 살아갈 바탕, 즉 갖추어진 지혜가 드러난다. 이 지식은 경험을 축적해 발판으로 이용하도록 이끄는 생명체의 생존을 위한 핵심 기술이다. 신생아는 얼굴을 선호하며, 병아리들은 딱딱한 무생물보다 움직이는 폭신한 생물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나 갓 태어난 병아리와 아기에게는 움직임과 얼굴을 ‘좋아하는 법’을 경험하거나 배울 시간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생동감 넘치는 물체 선호, 얼굴과 따뜻한 표현에 대한 선호는 선천적 앎의 대표적인 예로서 살아남기 위한 학습의 밑그림이 된다. 또한 지속적으로 쌓이는 경험을 배움으로 매끄럽게 전환하는 주요 고리 역할을 한다.

· 고양이 머리에 어미 닭 얼굴 가면을 씌우면 병아리는 다가갈까? 
· 물구나무선 채로 걷는 암탉을 새끼들이 따를까? 
· 가속하는 물체, 감속하는 물체 중 아기와 병아리가 선호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 왼쪽과 오른쪽, 엄마와 형제를 알아보는 뇌는 어떤 쪽인가? 
· 병아리와 신생아는 어떤 도형을 좋아할까? 
· 먹이가 많은 곳까지 길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실험 결과를 사례로 들어 각인된 지식이 “생명체를 둘러싼 환경에서 최소한의 정보로 혼란스러운 다양성을 피할 수 있게 돕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촘촘한 근거를 내세우며 “초기 행동은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각인되어 있으며 이러한 본능적, 선천적 행동을 살피는 것이 지식의 기원을 이해하는 열쇠”임을 주장한다. 신생아나 병아리 등은 태어난 직후 필요하다면 덧셈과 뺄셈, 나눗셈까지 자연스럽게 하고, 구조물을 기억해 길을 찾는다. 우리, 생명체가 가진 최초의 지식은 놀랍도록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경험과 배움 이전에 그것을 배우기 위한 사전 장비, 선천적 앎이 유기체의 뇌에 탑재되어 진화하지 않았다면 인간뿐 아니라 척추동물은 지금의 형태로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누대에 걸쳐 얻은 지혜와 앎을 뇌에 깊이 새긴 채 태어난 것이다.

병아리의 각인 현상은 생물학계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어지는 주제다. 각인 자체의 주목도와는 별개로 쥐, 초파리, 예쁜꼬마선충 등을 모델생물로 활용하는 과학계에서 닭은 그리 많이 연구된 편은 아니었다. 이러한 시기에 저자는 지식의 기원을 풀어낼 단초로 각인과 닭을 주목했다. 그리고 콘라트 로렌츠, 더글러스 스폴딩 등 과학 영웅의 동물행동학 연구를 계승하면서 자신만의 생각을 구체화할 독특한 실험실을 꾸렸으며 뚜렷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학계에 발표했다. 지식의 연원을 찾아가는 평생에 걸친 그의 여정은 강렬하게 과학계에 논의할 거리를 던졌고, 그 결과 신경학계, 동물행동학계는 새로운 담론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신경과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로서 저자는 지식의 시작을 경험과 배움의 산물이 아닌, 다른 가능성으로 본다. ‘지식은 후천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진화의 산물이자 본성이라는 관점’이다. 자연사의 기나긴 시간대에 걸쳐 수많은 세대를 통해 축적된 지혜가 유기체의 뇌에 각인되었다는 새로운 발견은 오랜 시간 호기심을 잃지 않은 꾸준한 학자의 탐구가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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