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처리”
상태바
“유연한 처리”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4.03.30 0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기홍 칼럼]

의대생들은 졸업 후에 대부분 수련병원에서 인턴과 레지턴트로 근무하며 전문적인 훈련을 쌓는다. 내가 근무한 강원대의 경우 유력한 수련병원은 강원대학교병원이다. 1997년에 의대를 설립한 뒤 2000년에 도립 춘천의료원을 인수하여 교육병원으로 개편하고 그동안 인력과 시설과 규모를 확대해 왔지만, 지도전문의, 병상 규모, 시설, 장비 및 진료실적 등을 평가하여 승인받은 수련의 숫자는 아직도 입학정원 49명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모교’ 병원에서 수련 기회를 얻지 못한 졸업생들은 수도권의 대형병원들로 이동한다 (물론,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같은 ‘비인기분야’는 지원자가 거의 없어서 승인받은 정원조차 채우지 못한다).

의대 교수들과 ‘비공개 간담회’를 마친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대통령은 ‘면허정지 행정처분의 유연한 처리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고, “법과 원칙이 있기 때문에 절차를 밟아나갈 수밖에 없다”던 정부는 절차의 진행을 멈춘 듯 보인다. 그런데 법령에서 정한 권한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고 업무를 집행하는 기구인 ‘행정’ 부서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법이 정한 절차’를 멈추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법령의 집행 과정에서 담당자의 ‘재량’이라는 것이 작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법령의 집행 자체를 좌우하거나 법령의 취지를 훼손한다면 ‘직권 남용’이나 ‘직무 태만’에 해당하는 범법행위가 된다. (그에 앞서,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같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부분에 대해서 상세한 공개는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건설적인 대화를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정도의 취지를 말씀드리면 충분할 것이다’라는 설명도 납득할 수 없다. 국민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다수의 생명이 걸려있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상당한 책임을 공유하는 인사들이 ‘대화의 상세한 공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은 무책임할 뿐 아니라 다수의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의 표출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인 ‘의대 입학정원 2천 명 증원’은 유연한 처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2천 명 증원의 산출 근거가 무엇인지, 설령 산출 근거가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3천 명의 입학생을 교육하는 의대의 역량으로 5천 명의 교육을 감당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다시 강원대 이야기를 하면, 현재 입학정원은 49명인데, 3월초에 총장은 교육부에 140명으로 증원 신청을 했고, 교육부는 132명으로 배정했다. 20여 년 동안 강원대병원을 확충했음에도 아직도 49명의 입학생을 수련의로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무엇을 근거로 총장은 (강원대학교병원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입학정원을 3배 가까이 늘려달라고 신청했는지, 또 교육부는 신청한 숫자에서 8명만 줄여 배정했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 의사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교육 역량과 관계없이 의대 입학정원만 증원하면 그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가 없다. 더구나 ‘2천 명 증원’은 심지어 증원 규모에 관한 사회적 논의조차 없이 느닷없이 정부가, 더 정확하게는 대통령이 공표한 것이지 ‘법령’에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법령은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어도 대통령의 지시는 유연하게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짐이 곧 국가’이던 절대왕정시대에나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의 지시가 법령보다 우선하는 일은 이번 정부에서 다반사가 되었다. 위원장, 부위원장을 포함한 5인의 상임위원(대통령 지명 2인, 여당 추천 1인, 야당 추천 2인)으로 구성하여 합의제로 운영하도록 법에 정한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통령이 야당 추천 상임위원을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2인의 상임위원만으로 사실상 독임제로 운영하며 여러 괴이한 결정을 하고 집행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사례는 그 본보기이다(관련 법령에는 위반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다). 대통령의 지시가 법령보다 더 강고한 준거로 작동하는 일의 뿌리는, 검찰총장이 ‘유연한 처리’를 지시하면 검사들이 법령과 무관하게 또는 법령을 무시하며 수사권과 기소권을 유연하게 행사하는 검사동일체의 원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전국의 검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정한 검찰청법 조항은 이미 20년 전에 폐지되었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