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성 과잉의 시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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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성 과잉의 시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손정욱 가천대·정치학
  • 승인 2024.03.2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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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현대 민주주의는 곧 정당정치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민주주의의 후퇴와 맞닿아 있다. 일당 독재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듯이, 복수의 유의미한 정당들이 존재해야 비로소 민주주의는 작동 가능하다. 그러나 과도한 당파성은 종종 내가 선호하는 정당을 절대적 옳음의 위치에 올려 놓고 정치를 선악구도로 만들어 결국 지지정당의 승리 외에 다른 가치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까지 이르른다. 설령 그것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민주적 가치보다 앞선 맹목적 당파성은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규범적으로 보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최우선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상대가 있는 현실정치의 선거게임 속에서 그런 이상론은 나이브한 접근이며 악한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선거에서 이길지를 고민하는 현실론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론을 압도하는 현실론의 명분은 그 목적의 타당함에 있다. 예컨대, 링컨이 노예해방을 위한 수정헌법 13조를 가결시키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을 돈과 관직으로 매수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윤리적 차원에서 돈과 공직으로 표를 빼앗아 온 것은 비판받을 문제지만, 그 부도덕한 행위는 노예해방을 위한 수정헌법 가결이라는 더 높은 가치 앞에서 현실론의 명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맹목적 당파성을 앞세워 민주적 가치를 침해하는 것은 현실론이라기보다는 그저 포퓰리스트적 권력추구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정당의 승리도 민주주의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당파성 과잉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을까. 서로를 적폐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불모의 흥분상태는 정책 일관성이라는 기준 앞에서 민망하게 진정된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작업중 사망한 고(故) 김용균 군의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중대재해처벌법의 통과 과정을 복기해보자. 2020년 총선에서 대패한 국민의힘은 ‘약자와의 동행’을 당의 슬로건으로 정하고 중대재해처벌법 통과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여의도연구원이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해 “국민의힘은 노동자 안전을 지키고 적극 보호할 수 있는 정책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산업재해라는 걸 방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 법률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전폭적으로 각 당 입장을 떠나서 해결할 문제 아닌가. 초당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과반 의석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공수처법 등을 야당과의 합의없이 단독으로 통과시켰으나 중대재해처벌법에 있어서는 수동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기업의 강력한 반발 속에 당론 채택도 거부했다. 단식투쟁을 하던 고 김용균 군의 어머니 김미숙 씨와 김태년 원내대표와의 면담은 더불어민주당의 수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국민의힘과의 법안 조율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법안 통과가 미뤄지고 있다는 김태년 원내대표의 발언에 김미숙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태껏 여당이 많은 법을 (단독으로) 다 통과시켰는데 왜 이 법은 꼭 야당이 있어야 돼요?”

하지만 두 정당의 입장은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에 다시 크게 요동쳤다. 윤 대통령은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등 문재인 정부의 반기업 정책으로 기업활동이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정의당과 연대해 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켰던 국민의힘이 집권 후에는 해당 법을 ‘문재인 정부의 반기업 정책’으로 규정한 것이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국정감사에서도 중대재해처벌법 이슈와 관련한 상임위원회에서 정부의 시행령 개정이 경영계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음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정당정책의 비일관성이 전면에 드러날 때 정치적 선악구도는 희미해진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고 앞장섰던 정당이 집권 후에는 소극적으로 변해버리기도 하고, 기업의 선호를 대변하던 정당이 어느 순간 소외된 노동집단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선악구도가 흐려질수록 정당 간 타협의 공간은 넓어지고 그제서야 민주적 정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실제로 중대재해처벌법은 어느 한 정당이 절대적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 간 이념적 간극이 줄어드는 국면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손정욱 가천대·정치학

가천대학교 가천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비교정치와 정치경제를 전공했으며, 주요 연구주제는 노동시장 이중화와 정당정치, 탈산업화 시대의 복지국가, 입법과정 분석 등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Who Represents Outsiders? A Comparative Study of the Netherlands, Ireland, and Sweden」, 「Dynamic Services, District Magnitude, and the Trilemma of the Service Economy」, 「선거제도와 정부당파성: 비례대표제는 여전히 중도좌파정부에게 유리한가」, 「노동시장 이원화와 반응성의 정치: 서비스업 임금 불평등과 중도정당 중심 정당체제의 정치경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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