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세계질서 프로젝트 실패 이후, 무엇이 (재)부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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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세계질서 프로젝트 실패 이후, 무엇이 (재)부상하는가?
  • 차태서 성균관대·정치학
  • 승인 2024.03.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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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30년의 위기: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 (차태서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544쪽, 2024.02)

 

이 책 역시 특정한 정세 속에서 탄생하였다. 연구의 서두는 2016년 7월 도널드 트럼프가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지명되는 시점에 쓰여지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7년가량 지난 2023년 가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포성이 여전히 울리고 중동에서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타오르는 가운데 전체 초고의 후반부가 일단락되었다. 각 장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들은 물론 각기 특수한 계기로부터 탄생한 것이지만, 또한 동일한 시대의 생산물이기도 하다. 즉, 이 글은 모두 탈냉전 ‘30년의 위기’라는 우리 시대의 고유한 역사적 국면을 미국과 세계질서의 변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 시도이다.

2020년대 초반은 세계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순환이 종료되었음을 조망하게 되는 시간이다. 2021년 여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탈레반 재집권, 2022년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은 단극체제의 균열과 자유세계질서 프로젝트의 종식을 재삼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두 에피소드 모두 탈냉전기 미국에 의해 추진된 단선론적 역사철학에 근거한 거대 사회공학 구상이 모순에 부딪혀 나타난 후과라는 점에서, 각 사건은 오늘날 세계체제 요동의 징후로서 읽혀진다. 그리하여 오늘날 ‘시대 전환’의 계기가 도래하면서 — 마치 갑자기 대지진이 발생하면 감춰져 있던 지층이 노출되듯 — 그전에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던, 미국이 건설하고 주도해온 자유국제체제의 진실된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회고건대, 팍스아메리카나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된 것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말기 전 지구적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대테러전이 수렁에 빠지던 때부터였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심도를 세계인 모두가 심각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이었고, 이때부터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 코로나 팬데믹 기간 글로벌 거버넌스의 기능부전, 그리고 마침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등의 사건을 경유하며, 우리는 전간기(interwar period)의 기시감 속에 국제정치의 흐름을 불안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안정적 패권국이 부재한 ‘대공위기(Interregnum)’에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프로젝트가 파산에 이른 상황이라는 역사의 평행성 때문에 E. H. 카의 불온한 예언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게 된 셈이다. 마치 전간기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짧은 간주곡에 불과했던 것처럼, 지난 탈냉전 30년의 ‘좋은 시절(belle epoch)’도 구냉전과 신냉전 사이의 휴지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상의 문제의식 아래 본서는 총 3부 10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전체의 이론적 분석 틀을 소개하는 서장에서는 저명한 역사가이자 고전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태두인 E. H. 카의 『20년의 위기』를 원용, 양차 대전 사이 시기와의 유비를 통해 우리 시대 거시적 변동의 대강을 이해해 보고자 했다. 여기서는 특히 패권구조의 침식과 자유주의적 세계 비전의 실패 속에 지정학적 경쟁이 귀환하고 비자유주의적 사회세력이 고양되는 양상에 초점을 두고서 냉전 후 30년 세계질서의 궤적을 시론적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제1부에서는 역사의 돌발적 에피소드로 치부되기 쉬운 ‘트럼프 현상’을 미국의 정치운동과 사상의 계보 그리고 국제구조의 맥락에 위치 지움으로써 그 성격을 명확히 하고, 동시에 그것이 동시대 세계질서 전반에 지니는 함의를 탐구하였다. 제1장이 미국 포퓰리즘 운동의 궤적 속에 트럼프주의의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면, 제2장에서는 미국사에 면면히 흐르는 반제국적 공화주의 전통에 비추어 트럼프 독트린의 핵심을 파악해 보았다. 이어서 제3장에서는 지금처럼 미국 패권의 하강 국면에 집권했던 리처드 닉슨의 현실주의적 대전략과 트럼프의 이단적 외교 접근법의 유사성을 비교하였다.

제2부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집권한 트럼프 행정부의 다사다난했던 행적을 민족주의, 주권, 동맹시스템 등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제45대 미국 대통령의 대내외 정책이 자유국제질서 전반의 위기와 어떻게 결부되었는지 묘사하였다. 제4장에서는 미국의 전통적인 예외주의 정체성과 대외전략에서 이탈함으로써 트럼프 정부가 야기한 국내외 혼란과 갈등을 다뤘다. 이는 포퓰리즘의 자장 속에 미국이 자기 역할 개념, 전략적 내러티브 등을 현실주의 방향으로 변환시키고, 자유국제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전 지구적 공공재 제공 역할을 방기했을 때, 과연 어떤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제기했다. 다음으로 제5장과 제6장에서는 본래 탈근대적 네트워크 주권을 추구하며 근대 베스트팔렌 질서의 극복을 지향해온 미국의 대전략 노선이 일국 중심의 주권 관념과 동맹 개념으로 ‘퇴행’했을 때, 어떤 파급 효과들이 초래되었는지를 트럼프 시기 주요 국내외 정책별로 탐색해 보았다.

제3부는 트럼프 정권에서 바이든 정부로의 이행기 과정을 추적하여, 탈단극 시대의 비전을 둘러싼 미국 내 사회세력 간 노선투쟁이 미래 미국정치와 국제질서 변동에 갖는 의미를 설명하였다. 제7장은 비자유주의적 특수 서사에 기반한 트럼프주의자들과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보편 서사를 복원하려는 바이든주의자들 간의 대결이 2020년 대선 국면부터 현재까지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어떠한 전선을 형성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제8장에서는 2010년대 이후 국제정치의 메가 트렌드-탈자유질서화와 현실주의적 세계로의 진입-가 ‘가속화’되는 국면으로 팬데믹 시기를 조망하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빨라진 역사의 흐름을 재감속하는 제어장치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자 했는지를 검증했다.

본서의 내용을 종합하는 결장에서는 탈냉전 시기 단극체제가 다극적 전략 경쟁체제로 서서히 대체됨에 따라 팍스아메리카나의 거대한 요동이 나타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전 지구적 권력균형의 변동 과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규정하였다. 이어서 향후 출현할 세계질서의 모습을 예측해 보고자 했는데, 통상적인 국가 간 관계의 재정렬이라는 측면에서는 세계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양분되되 그 사이에서 헤징하는 국가들도 증가하는 ‘불명확한 분기’가 주된 경향성으로 부각되고 있는 반면, 보다 근원적인 조직 원리의 시각에서는 비자유주의적, 특수주의적 ‘문명국가들’이 지역별로 구축하는 위계적 국제질서들이 상호 경쟁하는 ‘다질서 세계’의 등장 가능성을 설명하였다.

다른 한편, 이 책은 특정한 정세의 산물인 동시에 또한 지배적인 정세에 이론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단극하 자유국제질서라는 낡아버린 전제 혹은 ‘역사의 종언’ 류의 자유(승리)주의적 시대정신 속에 세계를 파악하려는 지적 관성에 대한 비판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대변동의 시대 — 전후 80년 가까이 이어진 “동시대사의 종언”이자 거대한 현상 변경 — 에 지정학적 단층선 혹은 파쇄지대를 따라 연쇄적인 안보 위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대만–한반도 같은 인화점들이 거대한 체인으로 연결되며, 전쟁 “연루”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격동기에 우리는 ‘각주구검’의 고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명청 교체기나 구한말에 비유할 만한 근본적인 시대 변화가 현 역사 국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인지한다면, 그간 당연시되었던 한국 외교의 정책 패러다임이 더 이상 현실적인 해법이 되지 못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전제와 가정 전반을 재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사실상 전 기간 대한민국은 미국의 압도적 현존과 패권질서를 디폴트로 삼아 외교정책을 구성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한 기본조건이 거의 사라진 환경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된 국가전략 패러다임을 생산해 내야만 하는 산고의 시간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차태서 성균관대·정치학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연구원, 공군사관학교 군사전략학과 전임강사 등을 역임했다. 담론 분석과 정치사상사를 기반으로 미국 외교와 세계질서 변동 연구에 집중해왔으며, 최근 몇 년간은 국제정치학에서의 인류세 논의와 함께 북한-미국 관계의 역사적 궤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앞으로는 성찰적 현실주의의 세계관을 토대로 신냉전 시대 국제관계 변화와 한국 외교의 대응 방향에 대해 모색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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