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네 얼굴의 유의(儒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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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네 얼굴의 유의(儒醫)
  • 김호 서울대·한국사
  • 승인 2024.03.1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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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허준 평전 - 네 얼굴의 유의』 (김호 지음, 민음사, 280쪽, 2024.01)

 

‘허준’, 조선을 대표하는 명의다. 여러 차례 인기 드라마의 소재가 될 만큼 유명하니,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정도이다. 올해 필자는 ‘허준 평전’을 집필했다. 2000년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그의 일생을 다룬 후, 20여 년이 흘러 새롭게 발굴한 자료들을 보강하고 문제의식을 다듬어 다시 써 본 것이다. 원고를 넘기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산뜻한 표지와 읽기 좋은 판본의 책이 배송되었다. 한편으로 오래 붙들고 있었던 숙제를 마무리해 후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번 그러하듯 아쉬움이 남았다. 허준의 면모를 ‘네 가지 얼굴’에 담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는가 싶다가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위안하기를 반복했다. 

항상 그렇듯이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 혹은 제도 등을 정확하게 고증하는 일은 역사가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의 연속이다. 이번 책을 집필하면서도 얼마 남지 않은 허준 관련 사료를 다시 한번 모두 수집하고 점검했다. 역시 완전히 새로 쓸만한 내용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한 자료를 모두 정리해 보았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허준은 역사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역사 속의 허준은 내의원 출사 이전, 서울 및 호남 지역에서 이름을 떨쳤던 유의(儒醫)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무관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은 무과에 합격 후 지방관을 역임했으며, 외가 역시 전라도 무반(武班) 가문이었다. 조선의 서녀들이 그러하듯이 허준의 어머니도 서녀였다. 당연하게 양반의 첩이 되었고 허준은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좋아했던 허준은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책과 의서에 밝은 학자로 성장하여 젊어서부터 그 명성이 대단했다. 유교적 소양이 충분한 데다 의술이 뛰어나 한 집안의 건강관리는 물론 공동체 구성원들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었던 이들을 역사에서는 ‘유의(儒醫)’라고 불렀다. 이들은 의술을 전업으로 삼기보다 지역과 국가를 위해 자신의 지식을 베풀고 기술을 실천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준 역시 그러했다. 젊어서 고관대작이나 향촌 사족의 신병(身病)을 치료하거나 그들 가족과 친구들의 건강을 돌보았지만, 내의원에 출사한 이후에는 여러 종의 구급 의서를 비롯하여 ≪동의보감≫과 같은 거질 의서의 편찬 사업 그리고 역병 연구에 평생을 바친 진정한 유의였다. 

허준이 활동했던 16세기 후반의 조선 지성계는 성리학이 주류였지만 도가의 양생술을 지향하거나 양명학에 침잠하는, 혹은 실증을 강조했던 학자들 덕분에 다양한 사상의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유·불·선 삼교(三敎)를 아우르면서도 성리학의 기획에 부합하는 의서가 필요했다. 선조(宣祖)는 조선을 ‘장수의 땅[仁壽]’으로 만들려는 희망이 컸다. 선정(善政)의 주인공이 되고팠던 왕은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명하면서, 첫째는 ‘병들기 전의 예방’을 중시하고 둘째는 ‘조선의 향약(鄕藥)’을 활용하여 백성들이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주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의보감≫이 완성되자, 허준은 조선을 더 이상 동쪽의 약재도 부족하고 의학 수준도 높지 않은 ‘궁벽한 주변’이 아님을 천명했다. 조선 의학은 천지상하와 동서남북의 육합(六合), 즉 천하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동의(東醫)로 정의되었다. 조선은 중화의 주변이 아니라 스스로 중화 문명의 동반자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성리학에서 모든 인간은 보편적인 리(理)를 품부받는 동시에 주어진 기(氣)의 차이로 인해 각각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기질[氣]의 차이를 알려해도, 인간 보편[理]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되어야 했다. 조선 ‘사람’은 보편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조선’ 사람의 기질에 따라 특별했다. 허준의 동의(東醫)는 중국의 남·북에 비해 동쪽 사람들의 기질을 고려하면서, 공히 인간다움[리]을 갖춘 보편적 인간을 치료하는 방법이었다.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는 보편적 인간 즉 ‘자연을 닮은 인간’을 상징했다. 허준은 ‘자연의 천리와 당연(當然)의 윤리’을 통일시킴으로써 인간다움의 윤리적 근거가 자연[본성]에 있음을 증명했다. 인간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함은 그것이 ‘본성[자연]’이기 때문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인간을 자연의 모사로 정의하고, 성리학에서 원하는 도덕적 삶, 즉 당위[사람다움]의 근거를 자연에 근거지웠다.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사회질서를 ‘강제’가 아닌 ‘자연’에 정초할 합리적 설명을 획득할 수 있었다.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윤리를 결합함으로써 심신의 절제와 조화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양생]으로 제시했던 ≪동의보감≫이야말로 확실히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정치적 성과였다. 이는 허준이 단순한 의원이 아닌 유학을 토대로 불교와 도가의 인간론을 통섭할 수 있는 유의(儒醫)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준은 출사 이후 평생을 내의원 어의로 활동했던 만큼, ≪동의보감≫에는 조선왕실의 의약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 의료의 오랜 전통은 ≪동의보감≫의 속방(俗方)으로 집대성 되었다. 속방 중 상당수는 내의원 어의들의 처방이었다. 가령 전약(煎藥)은 동지를 맞아 내의원에서 제조한 약선(藥膳)으로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거나 외국 사신들에게 접대한 음식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민간에 널리 퍼져 일반의 기호품으로 변화했는데, ≪동의보감≫에는 ‘속방’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의 의료 전통은 이렇게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후대로 전해졌다. 

왕실의 명주(名酒)도 역시 ≪동의보감≫에 채록되었다. 값비싼 향신료 후추를 이용한 자주(煮酒)라든가, 자초(紫草)를 이용한 붉은 홍주는 대표적인 왕실의 술이었다. 여름철 수일 만에 숙성시켜 음용했던 백화춘 역시 호산춘과 더불어 왕실의 대표 명주 가운데 하나였다. 허준이 왕실의 비법이나 특별한 처방만을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려 말 이래 수백 년 전래된 오래된 고방(古方)을 정리했다. 민간에서 널리 사용하던 향약 고방 역시 ‘속방’의 이름으로 ≪동의보감≫에 수록되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 파를 썰어 뜨거운 술과 함께 마신 후 땀을 낸 처방, 납월에 말똥차[馬通茶]를 마셨던 풍속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었다. 까치무릇[茨菰]의 뿌리와 줄기를 찧어 종기에 붙이는 처방 역시 조선후기로 이어졌다. 조선 의학의 오랜 전통 지식들이 후대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동의보감≫ 편찬을 주도했던 허준 덕분이었다.

이외에도 허준은 조선의 동·식물을 탐구하고 한글로 풀이하여 민간의 활용을 도왔다. 세상의 모든 사물(事物)의 명(名)과 실(實)이 상부해야 비로소 자연의 운행이 어그러지지 않았다. 실물[實]은 존재하는데 호명할 이름[名]이 없다면 질서정연한 세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허준의 자연학은 형이하학인 동시에 형이상학의 수립을 향한 지난한 과정이었다. 자연의 지식학이자 당위의 윤리학이었기 때문이다. 허준은 조선에 존재하는 초목과 동물 그리고 날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정확하게 명명하려 했다. 자연의 질서가 어그러지지 않을 때 인간의 삶 또한 온전하기 때문이었다.

1612년과 1613년, 노년의 허준은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역병으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연구와 의서 집필에 생의 마지막을 바쳤다. 칠십의 나이를 잊은 채 그는 난생처음 겪는 역병을 물리치고자 환자들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연구와 치료법은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이라는 위대한 역병 연구서에 고스란히 전한다. 역병의 원인은 자연의 부조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간의 ‘불공정한 정치’에서 역병이 기인했다. 허준에게 인정(仁政)이야말로 인술(仁術)이었다. 

광해군은 기왕의 역병 의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의서를 허준에게 요구했다. 허준은 역병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 무엇보다 역병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왕실을 포함해 많은 조선 사람들은 역병을 역귀(疫鬼)나 마마귀신의 소행으로 보고 약물치료를 회피했다. 적극적으로 치료하다가 귀신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 나머지 하늘에 빌고 귀신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이들에게 적극적인 약물 치료를 권하려면, 무엇보다 역병의 원인에 대한 합리적 설명과 설득이 필요했다. 또한 환자의 증세가 가벼운 단계에서 심각한 수준으로 변화할 때마다, 증상에 따른 구체적이며 손쉬운 처방을 제공해야 했다. 

허준은 자연의 순환[운기론]을 근거로 역병의 원인을 설명했다. 화(火)의 해에 독열(毒熱)이 치성하는 것은 당연했다. 1612년 이듬해 1613년이 그러했다. 나아가 위로받지 못한 여귀들과 청결하지 않은 환경, 그리고 공정하지 않은 정치 등도 역병 발생의 조건들로 충분했다. 자연의 운기는 어찌할 수 없지만 여귀를 위로하고, 잘못된 정치를 성찰하는 지방관의 도덕성은 역병 예방과 종식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특히 역병의 유행은 한 개인의 고통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야기했다. 환난상휼(患難相恤)이 절대적이었다. 역병 예방을 위해 향촌 구성원들이 약물을 준비하고 술을 빚어 함께 마시는 이벤트[의례]도 중요했다. 약술을 마시고 팥죽을 나누면서 역병에 대처하는 공동체의 연대가 단단해졌다. 허준은 궁벽한 시골의 형편을 고려하여 간단한 처방을 선호했지만, 단방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고가의 약물을 부조하고 함께 고통을 견디는 나눔의 호혜가 필요했다. 향촌의 사족과 평민 누구 할 것 없이 공공의 실천에 나서, 기꺼이 책무를 떠안아야 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선비[士]’였다. 

심지어 역병 앞에서 부모·자식의 인륜마저 무색했다. 역병의 공포로 인간다움의 근간이 흔들렸고 이를 극복할 방법이 필요했다. 허준이 설명한 ‘전염되지 않는 법’은 의학이 얼마나 사회적 지식이며 공공의 실천인지 잘 말해준다. 역병의 극복은 환자 개인의 감염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역병 환자를 돌보는 최소 단위인 ‘가족[家]’의 유지와 이를 넘어 향촌공동체의 안녕이야말로 궁극의 목표였다. 인술은 인정(仁政)과 더불어 종착지가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러했고 21세기를 맞이한 지금도 그대로다. 필자는 사실 팬데믹을 과거의 역사 속에서나 확인했을 뿐 직접 경험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발생한 코로나 유행을 몸소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평생을 의학자로 살아온 허준, 특히 백발의 노성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위해 역병 환자를 임상하고 치료법을 모색했던 유의 허준의 삶을 정리하면서, 필자 또한 허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학은 특별한 사회적 실천이다. 자신을 위한 전업(專業)의 도구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인술(仁術)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실천은 빛날 수 있다. 조선의 대표적 유의(儒醫) 허준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김호 서울대·한국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과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 재직 중이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과 위기 극복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미래 지향의 한국학을 모색 중이다. 저서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조선 왕실의 의료문화』, 『조선의 명의들』, 『정조의 법치』,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100년 전 살인사건-검안을 통해 본 조선의 일상사』, 등이 있고 『신주무원록』, 『다산의 사서학』(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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