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일본과 ‘루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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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일본과 ‘루쉰’의 탄생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3.1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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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을 만든 책들 (상): 메이지 일본과 진화·개인·광인 | 리둥무 지음 | 이보경·서유진 옮김 | 그린비 | 656쪽

 

어떤 독서를 통해 루쉰은 자기 사상의 기초를 쌓고 확장하여 뛰어난 사상가가 되었을까? 이 책은 청년 루쉰, 즉 「광인일기」를 통해 문단의 권위가 되기 이전의 루쉰에 주목한다. 저자 리둥무는 루쉰의 ‘독서 이력’에 집중하여 구체적인 자료들을 찾아 제시한 후 그가 쌓고 확장해 나간 지적 세계의 뿌리를 설득력 있게 펼쳐 보여준다.

근대 초기, 메이지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양 사상은 동아시아의 문인, 사상가들을 비롯하여 문화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바로 그 시기의 일본, 즉 국가주의의 광란에 빠져 있던 메이지 일본에서 7년 남짓 유학했던 청년 루쉰, 아니 저우수런은 도쿄 독일어전수학교에 적을 두고 마루젠서점 2층에서 갓 수입된 서양 서적과 일본 문인·사상가의 저서와 역서를 읽은 후 발췌, 인용, 심지어 도용하며 중요한 글들을 써나갔다. 그러면서 「광인일기」를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루쉰의 탄생과 메이지 말기 일본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제가 『월경越境―‘루쉰’의 탄생』인 이 책은 청년 저우수런이 메이지 일본에서 자신의 경계, 시대의 경계를 넘어 ‘루쉰’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루쉰의 독서 이력’이라는 키워드로 그리고 있다. 전후(戰後) 일본의 루쉰 연구는 대체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론’의 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을 매개로 제국 일본을 극복하고자 했던 다케우치는 루쉰의 사상 형성을 베이징 사오싱회관에서 생활하던 시기의 이른바 ‘회심’(回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루쉰의 문학은 유학 시절 일본의 문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루쉰 이전의 루쉰, 즉 저우수런은 1902년 3월부터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1909년 8월에 귀국했다. 이는 1881년생인 루쉰이 21살부터 28살까지 7년 남짓한 기간 동안 메이지 시대(1866~1912) 말기를 온몸으로 함께했음을 보여 준다. 이십 대는 지적 독서가 그야말로 집중되는 시기로 이때를 ‘사상’의 기초가 뿌리내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해석은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광인일기」 발표 이후의 루쉰이 아니라 유학 시절의 청년 저우수런으로 되돌아가서 그가 보고 읽고 인용하고 도용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가 이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 준다. 즉 루쉰이 소장했던 도서 목록과 목록에는 없지만 읽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책을 발굴하여 그것을 당시 루쉰이 쓴 글의 ‘취재원’으로 확정하고 이로써 메이지 일본 문단과의 영향 관계를 살펴본다.

저자는 루쉰이 구체적으로 어떤 독서 과정을 통해서 진화, 개인, 광인이라는 개념을 형성했는가를 보여 준다. 루쉰은 옌푸의 『천연론』뿐만 아니라 가토 히로유키의 『강자의 권력의 경쟁』, 오카 아사지로의 『진화론 강화』를 통해서 ‘진화’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한 ‘개인’ 개념은 니체와 슈티르너의 원저작보다는 메이지 문단의 구와키 겐요쿠, 다카야마 조규, 도바리 지쿠후, 사이토 신사쿠 등이 해설한 니체와 입센 그리고 게무야마 센타로의 무정부주의자 ‘슈티르너’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구성되어 갔음을 보여 준다.

저우수런이 어떻게 루쉰이 되었는가를 살피는 작업의 최종 목적은 「광인일기」가 어떻게 창작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지나인 기질』의 저자 하가 야이치 등의 식인 관련 언설과 그 밖의 광인 언설이 그 창작 배경으로 제시된다. 문학 텍스트로는 지금까지 알려진 고골의 「광인일기」 번역 외에도 마쓰바라 니쥬산카이도의 「광인일기」, 고리키의 「두 광인」, 안드레예프의 『붉은 웃음』의 일본어 번역 그리고 러시아문학 평론에 열심이었던 노보리 쇼무 등이 루쉰의 광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루쉰이 유학하던 시기의 메이지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껏 고무되어 국가주의의 광란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리둥무는 청년 루쉰이 메이지의 국체를 수용하거나 비판한 일본의 문인 및 사상가의 저술과 평론, 번역 작품을 읽고, 이를 통해 작가 루쉰의 탄생을 가져온 ‘광인’의 추형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다케우치 요시미와 달리 저자는 루쉰이 메이지 말기의 문단과 조우함으로써 「광인일기」의 창작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메이지 일본 문단의 모습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그려 준다. 반식민지 중국에서 건너온 유학생 루쉰이 우연히 조우하거나 의식적으로 선택한 모습이다. 메이지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력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중국)에게 필요한 개념을 구축하고자 고투했던 루쉰을 통해서 당시 우리는 누가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을 통해 어떻게 ‘근대’와 ‘근대문학’을 구성하고자 했는지를 상상하게 하고, 관련 연구 의욕을 촉발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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