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의 근대 이념은 제국주의 탐욕의 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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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의 근대 이념은 제국주의 탐욕의 가면이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3.0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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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과 현실: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한국근대사 다시 읽기 | 정태헌 지음 | 역사비평사 | 528쪽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에 대응하여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한 근대 한국’이다. 이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은 한반도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적대적 분단시대를 넘어 민주주의와 고른 경제발전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을 키워내면서 계속 추구해야 할 주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 깊은 이해관계가 얽혀 글로벌하게 진행된 근대 세계사를 한국사 관점에서 보는 시각과 한국사를 세계사 속에서 보는 시각을 충돌시키고 조화시키는 과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까지 근대역사학은 국가의 이익을 앞세운 대외 침략 정책을 당연시한 채 이를 ‘세련되게’ 합리화해왔다. 근대 세계사에 동반된 제국주의와 관련하여 일본뿐 아니라 유럽 어느 나라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근대의 신분제를 대체한 근대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 ‘선언’은 세계사 시대구분의 기준이 될 만큼 위대한 진보였다. 물론 프랑스 혁명이 “천부인권과 법 앞의 평등”을 강조했을 때, 자유와 평등의 주체는 재산을 소유한 납세자에 한정되었다. 에릭 홉스봄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를 이중혁명(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시대라 칭했지만 이는 당연히 유럽사에만 국한된 이야기였다. 유럽인이 비유럽 사회에 대한 대학살의 문을 연 ‘대항해시대’ 이래, 특히 20세기 세계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을 거쳐 이루 셀 수 없는 제노사이드로 점철되었다.

즉 서구 근대가 선언한 ‘자유’와 ‘평등’은 인류의 보편적 개념이 결코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특히 비유럽 사회에서는 제국주의의 쌍생아로 기능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국제법’은 유럽 열강 사이에서만 통용되었다. 유럽 열강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땅을 자기들만의 ‘국제법’으로 ‘무주지(無主地)’라 규정하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합의’해서 나눠 먹었다. 또 그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서슴지 않았다. 비유럽 세계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갔다. 자유와 평등의 시대는 침략과 전쟁, 위선(僞善)과 배신의 시대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1825년 아이티 독립을 승인해주는 대가로 1억 5천만 금프랑을 요구했다. 아이티는 20세기 중반까지 그 ‘빚’에 허덕여야 했다. 영국은 중국에 ‘자유로운’ 아편 판매를 강요하는 침략을 자행했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동남아 침략에 나섰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도 유럽 제국주의는 ‘무주지’ 나눠 먹기 점령에 나서면서 새로운 식민지를 창출했다. 베를린 회담은 유럽이 아프리카를 ‘평등하게’ 나눠 먹기 위한 정리였다.

제국주의 시대 끝물에 막차를 탄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제병합된 것은 영국과 미국의 후원, 러시아와 프랑스의 방조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합종연횡에 따른 산물이었다. 영국은 러시아 방어를 명분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을 ‘인정’했다. 미국은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나눠 갖기로 일본과 합의했다. 하지만 38년 후 미국이 주도한 카이로 선언은 그 사이 적국으로 변한 일본의 지배로부터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독립”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제국주의 국제정치학은 이토록 노골적이면서도 무상한 것이었다.

유럽의 산업혁명이나 자본주의는 자유시장 경제나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번성했을까? 전혀 아니다. 유럽의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권력이 ‘공인’한 해적 활동과 약탈에서 시작되었다. 서구 경제의 급성장은 ‘대항해시대’에 세계 시장을 폭력적으로 독점한 바탕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자행한 식민지배의 산물이었다. 영국 산업혁명은 영국인들의 기술혁신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인도의 면직물업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면서 진행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국가의 보호와 지원 없이 방임된 채, 자유시장 경제하에서 기업-자본의 힘만으로 운영된 적은 ‘대항해시대’ 이후 오늘까지 한 번도 없었다.

서구 근대를 특징짓는 개념으로 흔히 민주주의, 근대 주권국가, 자본주의를 든다. 그러나 국가를 상실한 식민지에서 이 세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국 기업가를 뒷받침할 국가가 없는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 정부와 자본이 운영하는 식민지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고착되었다. 심지어 영국 등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은 전쟁 후에도 식민지배의 단맛을 계속 즐겼다. 프랑스는 전후복구에 집중해야 할 상황에서 기어코 옛 식민지 베트남으로 돌아와 결국 긴 ‘베트남전쟁’을 유발했다. 인도네시아는 돌아온 네덜란드와 4년 동안 독립전쟁을 치르고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독립 때까지 전후에 18년을 더 지배했다.

‘자유’와 ‘평등’이 비록 개인과 국가의 위계에 따라 제한된 허구적인 ‘선언’에 그쳤지만,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가치이자 과제임은 분명하다. 한국의 근대 역시 침략과 전쟁, 위선과 배신의 세계사 격랑 속에서 민주주의 확장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선언과 실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근대 세계체제에 편입된 이후 공화제민족국가 수립 노력은 제국주의 국제정치학에 밀려 실패했고 강제병합을 당했다. 

이후 민족운동의 본질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독립을 일국 차원의 문제를 넘어 세계평화로 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침략자 일본의 국민들까지 군국주의의 희생자로 포용하는 성숙한 인식이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3·1운동을 통해 ‘신민(新民)’이 주체로 등장하고, 독립운동 최고 지도 기관인 임시정부의 정체가 공화정으로 설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지향한 운동가들이 끊임없는 연대와 협력을 지속한 이유도 평화와 민주주의 실현이 독립운동의 최종 목표라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해방 직전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이 평화지향적 민주국가 구상에 합의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한국사 연구자로서의 문제의식을 갖고 세계사를 정리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일 수는 없더라도 외국사 연구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할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19세기 세계사를 정리할 때 프랑스 혁명의 의도하지 않은 여파가 유럽과 중남미에서는 식민지(속국)의 독립을, 중국 등 동남아와 중동-아프리카에서는 유럽 제국주의의 새로운 식민지 창출이라는 대조적 결과로 이어진 부분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런 흐름이 제국주의 시대 끝물에 막차를 탄 일본에 강제병합된 한국을 포함한 20세기 세계사에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 개념으로 보는 일각의 관성도 부정했다. 이는 제국주의-식민지 문제를 완전히 배제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후에도 계속 식민지배의 단맛을 즐긴 유럽 전승국들이 그들의 식민지에서 자행한 학살과, 패전국의 전쟁범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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