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 - 현대 미술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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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 - 현대 미술과 철학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4.03.09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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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제31강_ 이찬훙 이화여대 교수의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열 번째 시리즈 ‘오늘의 세계’ 강연이 매주 토요일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여섯 섹션 총 5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 공동체에서부터 개인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지금 여기의 어젠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론의 장을 펼친다. 오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추이를 점검해보는 네 번째 섹션 ‘오늘의 사회와 문화’ 제31강 이찬웅 교수(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 - 현대 미술과 철학


이찬웅 교수는 글자 그대로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을 한 번에 정리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그 논의의 범위를 “현대 미술 중에서 주목할 만한 몇몇 작품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보일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상이한 길을 따라 탐구”해왔다며 이와 관련하여서 대표적 사례로, “일본계 독일 미술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미디어 작업과 “프랑스 미술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설치 작업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왜냐하면 그들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수준에 속하는 발터 벤야민과 질 들뢰즈의 철학을 얼마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두 사람을 전후로 “각각 하나의 사례를 덧붙여”, “서론격으로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작품 하나”를 통해 “현대 미술의 성격”과 “현대 미술에 담겨 있는 시간성에 대해” 살펴보고 끝으로는 “21세기에 회화가 주요 매체로 복귀했다는 평가가 많은바, 회화 작가의 대표격으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를 다룬다. 

 

지난 2월 3일, 이찬웅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오늘의 세계>의 3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서론

파울 클레는 현대 예술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100여 년 전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여러 현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보일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상이한 길을 따라 탐구했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사례로서 일본계 독일 미술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과 프랑스 미술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작업 세계를 다루고자 한다. 이들은 각각 지난 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수준에 속하는 발터 벤야민과 질 들뢰즈의 철학을 얼마간 반영하고 있다.

이 철학자들은 무엇이, 그리고 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벤야민은 어떤 것이 역사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들뢰즈는 어떤 것이 현실적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히토 슈타이얼의 미디어 작업과 벤야민의 사유, 그리고 피에르 위그의 설치 작업과 들뢰즈의 철학을 연결해 이 발표의 본론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서론격으로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작품 하나를 보려고 하는데, 이를 통해 현대 미술의 성격, 그리고 현대 미술에 담겨 있는 시간성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21세기에 회화가 주요 매체로 복귀했다는 평가가 많은 바, 회화 작가의 대표격으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를 다루고자 한다. 

 

1.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

첫 번째로,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작업을 현대 미술의 아이콘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에 발표한 그의 작품 「시계(The Clock)」는 그 다음해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기존에 상영된 영화들에서 많은 장면들을 발췌해서 편집한 것이다. 상영이 진행되는 동안 실제 시간에 맞추어 영화 안에서도 1분 단위로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각 영화 장면 안에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내용과 맞물려 시간이 이처럼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은 관람객에게 묘한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음 1분 후에는 어떤 영화 장면이 나올까? 특히 감상자들을 압도했던 점은 이 작품의 상영 시간이다. 이 작품은 만 하루 24시간 동안 진행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시계처럼 기능한다.

21세기의 새로운 현상 중 하나는 영화관의 예술 영화와 미술관의 미디어아트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 「시계」는 소위 예술 영화와 미디어아트의 경계가 해체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이 경계 위에서 영화가 미술관으로 범람해 진입해 들어왔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이제 시간이 충분히 흘러 영화사를 채우고 있는 많은 장면들이 마치 병사들이 되고, 잘 조직된 채로 미술관으로 진격해오는 것만 같다.

자크 랑시에르는 『모던 타임스』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미학 이론을 영화와 미디어아트 등의 운동 이미지에 적용해 활성화한다. 이 책은 시간성이라는 주제와 그것의 여러 양상들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클레이의 작품 「시계」는 랑시에르의 미학적 체제 안에서도 어떤 경계에 위치하고 그만큼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경계의 한쪽은 ‘현재주의(presentism)’라는 부정적인 것이고, 경계의 다른 편은 ‘시간의 원자들’이라는 긍정적인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어떤 것을 감각할 수 있는가를 규정하기 때문에 시간 개념은 중요하다. “Aesthetics”는 좁은 의미에서는 미(美)에 관한 이론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감성에 관한 학문을 의미한다. 랑시에르에게도 “Aesthetics”는 아름다움이나 예술에 관한 이론이기 이전에 우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의 체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보고 들을 수 있다고 믿지만,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사회적으로 조형된 시공간 안에서 작동한다. 적절하게 분할된 시공간 안에서만 우리에게 감성적인 것이 주어진다. Aesthetics는 이러한 “감성적인 것의 분할”의 양상을 포착하는 것이고, 예술은 감성적인 것이 분할되는 동시대 방식을 문제 삼고 그것을 변형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랑시에르가 진단하기에, 오늘날 인류는 시간의 차원에서 중장기적 시야를 상실하고 초단기적인 폐쇄 회로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을 “현재주의”라는 명칭을 인용해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클레이의 「시계」는 현재주의의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즉,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감각, 시간을 단지 24시간 단위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한계, 그 안에서 최대한의 스릴과 도파민을 추구하는 충동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작품의 구성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질적인 영화 장면들은 잘게 부서져 「시계」 안에서 대등한 자격을 가지고 평등한 관계 안에서 연결된다.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를 포함하여 많은 현대 미술 작품이 ‘현재주의’와 ‘시간의 원자들’이라는, 구분이 모호한 두 외양, 하지만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두 측면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다음 두 작가들로 넘어가고자 한다. 이 두 작가들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좀 더 밀고 나아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2. 히토 슈타이얼, 또는 벤야민의 ‘역사의 잔해’

히토 슈타이얼은 비판적 미술계 내에서 상업 예술과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계속해서 고취하고, 대치의 전선을 사회 변화에 뒤쳐지지 않도록 밀고 나가는 데 큰 공헌을 해왔다. 그녀의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은 자본주의 체제와 현대 미술계의 양쪽을 능숙하게 오간다. 심미적 미술이 세속적인 사회와 우아하게 구분되기는커녕, 어떻게 미술계가 금융-군사-데이터-자본주의의 원리가 무차별적으로 관철되는 대표적인 영역인지 입증한다. 그리고 역으로도 금융-군사-데이터-자본주의가 작동하고 확장되는 데 있어 이미지라는 상품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히토 슈타이얼은 마르크스와 벤야민의 깊은 영향하에서 21세기에 사회와 미술이 어떻게 분리 불가능하게 서로 깊게 얽혀 있는지 분석한다. 그녀는 “빈곤한(poor)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미지론을 전개한다. 우리 사회가 공인된 존재와 추방된 존재를 암묵적으로 구분한다면, 마찬가지로 미술계 내에도 공인된 존재와 추방된 존재가 구분되어 돌아다닌다. 가난한 또는 빈곤한 이미지가 곧 추방된 존재로서, 그것은 저해상도의 이미지로서 불법과 탈법의 회로 위에서 교환되고 거래된다. 

슈타이얼이 빈곤한 이미지의 존재를 강조하고 그것을 자신의 이미지론으로 삼는 것은 단순히 억압되고 추방된 존재에 대한 사회적 연민을 예술계로 연장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빈곤한 이미지론은 억압받는 자들의 정치 이론을 미술적으로 전용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미지의 사회적 존재 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도처에서 작동하는 존재의 불평등을 환기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지가 무엇을 재현하는가’라는 기존의 관점이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미지가 정치적이라면, 그것은 일군의 이미지가 사회를 비판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이미지가 사회 내에서 생산, 분배, 소비되기 때문에 그렇다. 요컨대, 히토 슈타이얼이 작품과 이론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이미지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우리는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에서 벤야민의 긴 그림자를 발견한다.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 진영 안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그가 맞서 싸운 것은 사회주의가 발전과 진보라는 이념하에 종속되어 있다는 관념의 대세였다. 벤야민은 맹렬하게 오직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는 역사의 방향에 대해 다른 방향의 운동이, 다른 차원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차원의 시간이란 반(反)목적론적 시간관인데,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해 있고, 현재의 매 순간에 구원과 혁명의 가능성이 스며들어 올 수 있는 시간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에세이, 특히 그중 9번째 테제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글은 벤야민 자신이 실제 작품을 구입했다고 알려진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에 대한 해설을 하는 형식을 띄고 있다. 다소 벤야민 자신의 투영이 가미된 해석에 따르면, 천사는 어떤 폭풍의 거센 힘에 밀려 뒤로 쓸려가고 있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으로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전쟁, 희생, 죽음, 파괴, 모욕 등 역사의 잔해는 끊임없이 우리 앞에 쌓이지만, 발전과 진보라는 맹목적인 이념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처하지 못하고 그저 발버둥치면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하지만 분명 역사 밖으로 버려진 파편들이 있다. 예술이 하는 일은 바로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역사의 잔해를 겨우 모으는 사람들이다.

히토 슈타이얼에게 역사의 잔해, 발전의 희생물은 빈곤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감성적 차별의 정치가 단지 인간들의 의식적 차원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디지털 자본주의하에서 이윤과 기술이 결합된 회로망 안에서 이미 선별적 필터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통제와 독점을 원하는 정부와 언론과 미디어 기업은 주장이 담긴 신호를 내보내 특정한 메시지를 주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옛날 방식이다. 대신 거대한 양의 잡음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 잡음의 쓰나미로부터 신호를 구분해낼 수 있는 노드와 필터를 제작해 제공한다. 이것들이 오늘날 각 개인의 이미지와 생각을 조형한다. 잡음으로부터 형태를 구분해내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과 도덕과 기술이 결합된 회로이다. 예술은 그것으로부터 걸러져 떨어져나간 잔해를 바라본다.

 

3. 피에르 위그, 또는 들뢰즈의 결정-이미지

피에르 위그의 작업은 영상과 설치에 넓게 걸쳐 있다. 일반적으로 그는 생명과 기술, 현실과 허구, 전시와 창조를 공존하게 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들뢰즈는 『시네마』(1983, 1985)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 오락과 예술 매체인 영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미지론을 전개했다. 이 저서는 영화사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다양한 유형의 이미지를 분류하고 있다. 이 이미지의 유형학은 ‘결정-이미지(image-cristal)’에서 절정에 이른다. 핵심을 말하자면, 크리스털 유리잔에서 이미지들이 굴절되고 반사되어 보이듯이, 결정-이미지란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가 서로 뒤엉켜서 합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가 서로 연결되어 순환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결정-이미지는 예술의 심장이다. 예술에 다양한 유형과 실험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평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을 내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결정-이미지라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성공 여부는 현실적 이미지를 그것의 이면에 잠재적 이미지와 결합해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결정-이미지 안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피에르 위그는 자신이 더 이상 전시에는 관심이 없고, 창조의 생물학적 형태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배열한 유기체들은 생물학적, 기술적, 허구적 요소들을 결합할 뿐만 아니라, 인간들, 동물들 그리고 비-존재들이 어떤 식으로든 진화해갈 수 있는 환경을 생산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어떤 사람(someone)에게 어떤 사물(something)을 전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 반대를 원합니다. 사람을 사물에게 전시하려고 합니다.” 이 말은 메를로퐁티가 자신의 예술론으로 삼았던 언명을 떠올리게 한다. 메를로퐁티는 『눈과 정신』에서 여러 화가가 공통적으로 한 말을 중요하게 인용한 바 있다. ‘내가 숲을 바라볼 때, 숲도 나를 바라본다.’ 회화의 시선이란 내가 숲을 보는 방향이 아니라, 숲이 나를 바라보는 방향에 서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 말하는, 나와 대상이 촉각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상호적 시선이다. 

피에르 위그의 취지는 이것과 비슷하지만 또 사뭇 다르다.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나길 촉구하면서도, 자연과 기계의 공생, 즉 인공생명의 배치 안에 어떤 시선이 있는지 작가 스스로도 알기 어렵다. 작품 안에는 예측 불가능하고 무수히 분기되는 시나리오들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들뢰즈가 말하는 결정-이미지가 형성된다. 결정-이미지는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가 합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최근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것을 단순하게 말하거나 과장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인간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인간의 사실적이고 실용적 시선과 인공생명을 경유하는 허구적 시나리오들을 보는 시선, 이 두 개의 시선을 두 종류의 이미지로 동시에 갖는 것, 초점이 잘 맞지 않지만 이 사이를 오가는 것, 더 나아가 이 사이에서 제3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 들뢰즈가 요구하는 예술적 시선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인류세에 피에르 위그의 작품이 요청하는 것이다.

 

4. 데이비드 호크니, 또는 경험주의자의 회화

많은 비평가들은 21세기에 회화가 복귀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지난 세기말에는 미디어아트가 새로운 매체의 대세를 형성하면서 회화를 낡은 양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전망에서 벗어나서 회화가 다시 대중과 평단 전체에 걸쳐 사랑받고 주목받는 흐름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더 이상 미래를 암시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닌 시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회화가 소셜 미디어에 잘 어울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경제적인 것인데, 금융 위기를 막기 위해 풀린 엄청나게 많은 돈의 상당 부분이 미술계로 흘러들었고, 유화가 보관과 거래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자신의 창작 작업을 통해 회화가 낡은 미술 양식이긴커녕, 인간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인지 보여준다. 우선 인간은 본성상 보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 그런데 사진은 우리가 보는 방식을 완전히 충족시켜줄 수 없다. 왜냐하면 통념과 다르게 인간은 사진처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대로 부분들을 크게 보고, 그것들을 연결하면서 지각하고, 그렇게 연결된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지각은 사진의 광학적 법칙과 미묘하게 어긋난다. 호크니에게 회화란 바로 이 차이 위에서 성립한다. 즉, 인간의 시각은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이지만, 그렇게 얻어진 인상들의 크기와 연결은 심리적인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다.

사진이 인간의 시선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회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물론 회화 작품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회화의 기반을 규정하는 근본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살고 있는데, 회화는 2차원이라는 것이다. 회화의 모든 문제는 이 점으로부터 발생한다.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많은 결정을 수반합니다. 3차원을 어떤 형태로든 양식화해야 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화가가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화가의 성공은 그 방법에 있어서 새로운 스타일을 발명하는 데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회화론은 그림이 단지 인간의 지각과 기억을 보존하는 유효한 방법이라는 사실에 멈추지 않는다. 그의 예술론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걸쳐 있다. 호크니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흄의 경험주의적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다. 나아가, 미술의 존재 자체가 경험주의적 세계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회화는 단순히 세계의 재현이 아니다. 세계는 3차원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2차원으로 보고, 따라서 세계를 보는 법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니라 바로 그림이 3차원의 세계를 분할해 만들어지는 2차원 이미지의 조각들을 연결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림 덕분에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는지 알게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리는 행위 자체가 매우 즐거운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순수하게 보는 자로서, 그리고 그리는 자로서 그가 누리는 지극한 즐거움은 요소들 사이의 ‘간격’에서 일어난다. 경험주의의 고유한 방법은 콜라주에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회화(painting)’라고 말하지 않고 ‘그림(picture)’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화와 사진을 대립시킬 때, 그는 그것들 사이의 대립은 그다지 크지 않고, 그림 안에 그 둘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사진 작업이 콜라주인 만큼, 드로잉도 이미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진과 회화는 본질적으로 같은 작업이다. “이미지를 짜 맞추는 것입니다.” 호크니는 디지털 사진의 시대에 그림의 넓은 정의를 제시해 그림의 영원한 승리를 선언한다.

 

결론

벤야민이 예술이 역사에서 벗어나는 잔해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히토 슈타이얼은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억압받은 자들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이미지’를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들뢰즈가 예술의 심장이 결정-이미지라고 말한 것처럼, 피에르 위그는 중심과 주변, 생명과 기계, 현실과 허구가 서로 자리를 맞바꾸면서 새로운 시대를 예비케 하는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인간의 시선이 사진의 광학적 법칙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회화의 가치를 다시 한번 찬양할 수 있었고, 감상자의 움직임이 풍경에 포함된 그림을 통해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생태 위기와 기술 가속 안에서 인간의 초상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이에 대한 예술의 반응으로서 세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대답의 방향은 상이한 곳들을 향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으로 규정된 인간상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주류 계급과 역사의 방향을 운운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기를 요구하고, 발전의 바깥으로 밀려난 것과 잠재적 이미지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을 두 눈 중 적어도 한 눈으로 보기를 기대한다. 관람객은 초점이 맞지 않아 현기증을 느끼겠지만, 현대 미술은 이것을 견디기를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기계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 미술은 더욱 더 인간적인 것에 천착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와는 무관하다. 현대 예술은 인간의 고유한 존재 방식, 인간의 고유한 시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을 향유하도록 초대한다.

요컨대 한편에는 탈인간적이고 분열증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있기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적이고 더 고유하고 예찬하는 시선을 갖기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 양자는 그렇게 생각만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토 슈타이얼과 피에르 위그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적인 것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잠정적이고 침전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역사적이고 실용적 한계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때 가장 고귀한 힘을 보여준다.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술적인 것을 통해, 기술적인 것과 대비하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확장하고 실천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더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힘과 성질을 찾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 (이찬웅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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