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역사학에서 공간의 역사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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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역사학에서 공간의 역사학으로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7.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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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놓친 역사, 공간으로 읽는다 | 여호규 지음 | 푸른역사 | 184쪽

 

인류의 어떠한 행위도 공간을 떠나 이루어질 수 없다. 인류는 공간을 무대로 삼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전개했다. 하지만 근대 역사학에서 공간은 상당히 오랫동안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심지어 ‘지리결정론’이라 하여 역사 연구에서 ‘지리’나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터부시하기도 했다. 근대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형성된 시간 우위의 역사관 때문이다. 이 책은 공간이론을 한국고대사에 접목한 책이다.

왕궁이나 도성 등 공간에 담긴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해 실증 연구와 이론 모색을 다각도로 진행해온 저자는 근대역사학에서 공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공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주요 개념을 고찰한다. 그런 다음 ‘사회적 생산 공간’ 개념을 차용하여 고대인들이 도성을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로 건설한 까닭, 삼국 초기에 경복궁과 같은 왕궁을 짓지 못한 이유, 지방 각지에 ‘또 다른 서울’을 건설한 배경 등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한국 고대 공간의 역사를 새롭게 규명할 연구방법론을 탐색하고자 한다.

저자는 공간을 왜 주목해야 하는지, 공간 이해의 출발점은 무엇인지를 살핀 후 공간이론을 한국 고대 공간의 역사에 적용한다. 먼저 고대 도성이 조선의 한양보다 더 계획도시였음을 밝히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도성을 격자형 가로구획으로 조영한 까닭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격자형 가로구획을 ‘공간을 통한 지배체제 구축’으로 본다. 격자형 가로구획의 건설이 “기존의 장소 정체성과 지배질서를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고, 새로운 장소감과 지배질서를 배태하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왕궁을 정점으로 하는 도성 전체의 위계적 공간구조를 창출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삼국 초기에 경복궁과 같은 왕궁을 짓지 못한 이유를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미정비’에서 찾는다. 삼국 초기에는 왕권이 확립되지 않아 국가 차원의 의례공간이나 집무실을 국왕 거주공간의 바깥에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왕궁 내부에 “경복궁의 사정전과 같은 나라 일을 돌보는 국왕의 집무실”을 마련하고,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국가적인 의례 공간”도 갖추었다는 것이다. 경복궁에 비견할 만한 왕궁은 고대 정치체제의 정비와 함께 오랜 세월에 걸쳐 출현했다는 것이다.

 

삼국이 지방 각지에 ‘또 다른 서울’을 건설한 배경 또한 ‘고대국가 운영 시스템의 특성’으로 설명한다. 신라의 소경, 고구려의 별도, 백제의 부도는 모두 도성과 같은 성격을 지닌 ‘작은 서울’이었다. 지방제도 정비 초창기에 삼국은 집권력이 강하지 못했다. 이에 “각지의 전략적 요충지에 지배 거점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통치력을 관철해나갔다.” “지방 행정 구역 내의 다양한 상대 공간을 포섭하여 공간 통합”을 진행한 것이다. 그런데 신라 도성인 경주는 삼국통일 이후 국토의 한쪽에 더욱 치우쳐 ‘재화의 공급 집적지’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이에 신라는 “전국의 교통 요지에 소경을 여러 개 건설하여 도성 중심의 물류망을 구축하고 영역 전체의 공간통합을 이룩했다.” 이러한 소경은 고려 이후 점차 사라지는데, 고려의 개경이나 조선의 한양이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재화의 공급 집적지’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바둑판 모양 계획도시가 고대 신분제의 구현과 연관되고, 왕궁의 공간구조는 정치체제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달라졌으며, 지방 각지에 건설한 ‘또 다른 서울’은 고대국가의 영역 지배원리와 연관된다는 저자의 고찰은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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