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바다, 배들의 실루엣과 수많은 반사광이 어둠처럼 멈춰 있다
상태바
잔잔한 바다, 배들의 실루엣과 수많은 반사광이 어둠처럼 멈춰 있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03.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경남 창원시 진해구 진해만 속천항

인적 없는 항구, 불빛은 고원의 밤별처럼 쏟아진다. 잔잔한 바다에는 배들의 실루엣과 수많은 반사광들이 어둠처럼 멈춰 있다. 바다를 진압하는 만(灣)이라 했나, 만곡도 수심도 깊은 진해만(鎭海灣). 조용한 진압, 그리하여 조밀하고도 부드럽게 발음되는 이름 위로 연분홍 꽃들이 반항처럼 피어난다. 여좌천변에 벚꽃은 피었을까. 꽃은 피어도 올해 진해에 봄 축제는 없다. 

▲ 속천항을 중심으로 진해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경관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 속천항을 중심으로 진해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경관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진해만을 이루는 서쪽의 곶은 안곡반도, 동쪽 곶은 대일반도다. 안곡반도 아래에 진해의 구항인 속천항이 있다. 그래서 진해만은 종종 속천만이라 불린다. 속천(束川)의 의미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해안가 구릉지로부터 흘러내렸던 물이 이곳에서 하나 된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속천항은 여전히 어부들의 터전이다. 등대의 불빛은 환하고 길게 뻗은 방파제도 주황색 빛을 발한다. 방파제 벽에 옛 속천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붙어 있다. 만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의 어림한 연식이 폭로된다. 새로이 들어선 숙박업소들의 횡대 앞에 여객터미널이 있다. 저곳에서 진해만을 한 바퀴 돌아보는 크루즈를 운행했었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 중단되었다. 터미널은 어둡고 커다란 여객선은 잠처럼 곤하다. 수협의 불빛이 도드라진다. “노래기!” 방파제 너머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동상처럼 서 있는 남자는 노래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방파제의 불빛을 헤치고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할머니의 손에 낚싯대가 들려 있다. 할머니 바지가 꽃밭이다.

▲ 불 밝힌 속천항 방파제와 등대. 낚시꾼들의 포인트다.
▲ 속천항 등대 아래에 인어 아가씨가 앉아 있다.

등대는 몸 전체로 빛을 발한다. 등대 아래에는 황동의 인어 아가씨가 속천항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우리와는 서로 다른 종에 속하지만 오래된 친구이자 뮤즈인 인어. 그러므로 이곳에 왜? 라는 물음은 갖지 않으련다. 불빛은 속천항을 중심으로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2013년에 설치한 경관조명이다. 우리는 항구의 밤빛을 받으며, 우리와 동일한 빛을 받고 있는 것들을 본다. 특색 없이 대담하게 곧추선 아파트, 객을 잃고 의기소침해진 모텔들, 여객 터미널과 수협과, 남자의 팽팽하고 투명한 낚싯줄과 할머니의 정강이에서 꿈틀거리는 꽃들을. 모두가 아름다웠고, 조금 더 소중하다거나 조금 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숙소에 불을 밝힌다. 창밖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만의 한 가운데에 섬 하나가 동그마니 떠 있다. 대죽도라 한다. 밤보다 까만 섬 앞에 불빛 하나가 박혀 있다. 어부의 배다. 잠시 후 빛은 섬 뒤쪽으로 사라졌고 항구에서부터 두 척의 배가 소리도 없이 차례로 출발했다. 배들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만을 따라 이어진 가로등은 오래도록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깊은 잠에 들어도, 어두운 먼 바다에서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밤새 횃불처럼 가까운 바다를 밝혔다.

▲ 속천항 왼쪽 바닷가에 속천만 갯벌이 펼쳐져 있다. 바다 한가운데 섬은 대죽도.
▲ 진해만과 진해루

푸른 회색빛의 아침, 속천항에서부터 진해만의 동쪽을 향해 나아간다. 항구를 벗어나자 속천만 갯벌이 다가온다. 호미처럼 굽은 여인의 허리가 갯벌을 헤집는다. “작은 게.” 그녀들의 노동의 몸짓에는 오체투지와 같은 경건함이 있다. “조개.” 남자는 매의 눈으로 갯벌의 구멍들을 탐색 중이다. 새들은 갯벌의 가장자리에 모여 사람의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날아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한다. 멀찍이 물러선 대죽도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희미하다. 다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커다란 누각인 진해루가 서 있다. 진해만 전체를 한눈에 껴안는 자태다. 곁에는 휴게소, 화장실, 관광 안내소, 인라인 스케이트장, 전망 데크, 발 씻는 곳, 수상 레저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진해루를 중심으로 일대를 보통 진해해변공원이라 부른다.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지역의 명소다.

동쪽의 대일반도 쪽으로 굽어들면 소죽도와 마주친다. 반도와 인접한 섬의 일원은 매립해 에너지 환경 과학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바다에 면한 섬의 가장자리에는 산책로가 놓여 있다. 대나무가 제법 많은 걸 보니 섬 이름의 연원을 알겠다. 저 앞바다의 대죽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지런한 낚시꾼들은 벌써부터 펜스에 붙어 서 있다. 바다에 발을 담근 낚시꾼들도 보인다. 한 사람이 연신 고기를 낚아 올린다. 미끼도 없이, 가만히 물속을 보다, 휙 낚아챈다. 어른 팔뚝만 한 고기가 공중을 가른다. 멀찍이 물러서 있던 구경꾼들의 얼굴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진다.   

▲ 소죽도. 섬 일원의 매립지에는 에너지환경과학 공원이 들어서 있고 섬 가장자리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 소죽도의 낚시꾼들.

소죽도 아래는 진해항이다. 비료 공장을 배경으로 한 공업항이자 신항으로 구항인 속천항과는 마주보고 있다. 넓고 풍파가 없는 진해만은 예로부터 천혜의 양항이라 했다 한다. 오늘도 진해만에는 살랑거리는 물결만 일 뿐 파도는 보이지 않는다. 이 너른 만을 따라 둥글게 이어진 길에 지난 밤 환하던 불빛 대신 소나무와 벚나무가 청량하다. 때를 기다리는 꽃망울들 속에 한 송이, 벚꽃이 피어있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