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극이 덕극이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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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극이 덕극이 되는 이유
  •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공연예술스쿨/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0.03.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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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 뮤지컬 ‘미드나잇’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 뮤지컬 ‘미드나잇’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공연계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팬데믹(pandemic)에 가까운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많은 공연들이 자취를 감추거나 일시적 중단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여전히 공연을 유지하고 있는 극들이 있다. 단체가 자부담한 비용으로 일부 운영되는 창작산실 선정 작품들, 민간 제작사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들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소위 ‘덕극’이라고 호명되는 뮤지컬들은 중단 없이 애초에 기획했던 공연 기간을 다 마칠 모양새다.

덕극 뮤지컬이 무엇인가. 주로 뮤지컬 덕후(마니아)들이 N번 반복 관람하며 객석을 채우는 극을 말한다. 덕극은 무엇보다도 뮤지컬 마니아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덕후들이 극을 보고 얼마나 많이 반복 관람을 하는가에 따라 흥행 여부가 결정되는 패턴이다. 덕극들이 공연을 내리지 않는 것은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쓴) 팬들이 극장을 여전히 찾아주기 때문이며, 따라서 극을 내려 팬들과의 약속을 뒤로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공연을 중단하게 되면 프로덕션에 소속된 많은 인력들은 그날로 실직자가 된다는 사실도 유효하다.

▲ 비지터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 비지터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그렇다면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서도 덕극이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칼럼에서도 주목했듯, ‘미시적인 소통방식’은 핵심어다. 그리고 약간 차원을 달리하면, 특정 인물 유형이 작품과 관객의 ‘미시적’인 소통을 이끄는 경우들이 있다. 현재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미드나잇>의 ‘비지터’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 계열의 인물들로는 근래 1년 사이에 공연된 뮤지컬 <사의 찬미>의 사내, <팬레터>의 히카루,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그레이맨 등이 있다. 주요 인물을 파멸로 이끄는 초현실적인 주인공들, 그야말로 작품을 파멸의 미학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이 ‘악역’들은 팬들의 다양한 해석을 자극하며 N번 관극을 이끌고 있는 핵심 요인인 것이다.

뮤지컬 <미드나잇>은 아제르바이잔의 작가 엘친의 희곡 <Citizens of Hell>을 원작으로 하여 영국의 극작가 티모시 납맨(Timothy Knapman)과 작곡가 로렌스 마크 위스(Laurence Mark Wythe)가 각색한 작품으로서, 국내 제작사 모먼트메이커에서 라이선싱하여 공연되고 있다(프로듀서 송민선, 연출 김지호, 음악감독 김길려, 2020. 2. 11 ~ 5. 3,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스탈린과 그 비밀경찰(NKVD)에 의해 약 70만 명이 처형되던 러시아의 대숙청 시대 1937년~38년을 배경으로, 비밀경찰을 자처하는 ‘비지터(visitor)’가 한 부부의 집에 들어와 그들의 일상을 파국으로 이끄는 이야기다.

▲ 맨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 맨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나라에 공을 세운 남편 ‘맨’은 부인 ‘우먼’에게 자신들을 지켜줄 프로텍션을 받았음을 알려 대숙청을 피해가는 듯하지만, 느닷없이 방문한 비지터가 이들의 위선과 허위를 스스로 폭로하게 함으로써 부부의 안전과 행복은 그동안 비밀리에 행해졌던 무분별한 ‘고발’에 의한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작품의 핵심은, 맨과 우먼이 무고한 변호사 부부를 반역자로 몰아 비밀경찰의 할당량을 채워주고 자신들은 (권력에 아부하는) 애국자가 되어 살아남았던 과정을 블랙 코미디 양식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또한 우먼이 맨을 스파이로 고발하여 죽게 하고 자신은 또다시 살아남는 결말은 작품의 테마를 은유적으로 보편화한다. 인간의 삶은 ‘안정’이라는 허위에 가려진 이기적인 자기방어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 비밀경찰의 모습을 한 비지터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악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 우먼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 우먼 (사진제공=모먼트메이커)

미드나잇의 팬들은 N번의 관극을 통해 비지터가 부부의 일상에 들어와 감춰져 있는 위선의 봉인을 벗기고 맨과 우먼이 이에 반응하는 모습에 속속들이 반응한다. 특히 인간과 악마의 경계에서 비지터가 묘사되는 방식은, 정체불명의 수위를 높여 팬들의 다양한 서브 텍스트 창출을 돕는다. 이번 시즌에는 고상호, 박은석 배우에 유리아 배우가 더해져 비지터의 젠더가 남녀로 확장됨으로써, 표현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미드나잇> 특유의 중의적인 대사, 드라마를 흐릿하게 만드는 미장센, 묘하게 심장을 파고드는 바이올린 선율은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들이다.

<사의 찬미>의 사내가 김우진과 윤심덕의 연애사를 프로그래밍하며 조종하는 방식, <팬레터>의 히카루가 세훈의 얼터 에고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개별적인 인물로 발전하면서 김해진을 파괴하는 과정,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그레이맨이 악마성을 높이며 페터 슐레밀의 스티그마(어떤 사람의 사람 자격에 가해진 손상)를 계속 자극하는 모습은 비지터의 인물형과 같은 계열에 놓여 있다. 이 ‘악인’들은 알려진 사실들에 균열을 내면서 인간의 본능적 면모에 불을 지피거나, 어떤 한계상황을 끝없이 상기시키며 내면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고, 비밀을 폭로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동력으로 극 안에 존재한다.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애매하게 감추고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한, 팬들은 그들을 끝없이 추적하며 파편화되어 있는 정보의 퍼즐을 자신의 시선으로 맞추게 될 것이다. 이 퍼즐 맞추기 ‘놀이’는 팬덤을 유지시키고 확장시키는 핵심 중 하나이며, 대학로 뮤지컬들이 비슷한 패턴의 악인들을 생산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팬들의 이 놀이가 내용을 스타일로부터 분리시키고, 오로지 스타일만 부각시키는 방편이 된다면? 팬덤과 작품 사이의 동역학이 부디 균형을 잃지 않는 세련된 시장으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 덕극이 덕극인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공연예술스쿨/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로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 창작뮤지컬에서 재현된 서울의 양상”, “여성국극의 혼종적 특징에 대한 연구”, “한국적인 것’의 구상과 재현의 방식”, “번역된 문화와 한국적 디코딩”, “‘근대적 지식인 되기’를 향한 욕망의 서사”, 『제국의 수도, 모더니티를 만나다』(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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