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국정치는 조금씩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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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국정치는 조금씩 진화한다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2.02.28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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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

제20대 대선의 시계가 3월 9일을 향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21일과 25일 개최된 두 차례의 대선 후보자 법정 TV토론회의 전국 시청률이 각각 36%와 33%로 나타난 것을 보면 상당히 많은 시민들이 시청한 것 같다. 1차 토론회는 경제 분야를 2차 토론회는 정치와 외교 분야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2차 토론회는 향후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상을 가늠하고, 아쉬운 대로나마 약간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였다.

흔히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로 지목되는 것은 주로 제왕적 대통령제, 양당제 구조,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이다. 이러한 국가 권력구조를 구성하는 기본제도들이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만 되면 무소불위의 권력이 주어지므로 죽기 살기로 싸워 쟁취해야 하고, 국회 회무는 여당과 제1 야당 사이의 설전과 표 계산으로 환원되기 일쑤이므로 나머지 정당의 입지는 거의 바닥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보조금 제도나 소선거구제 역시 거대 양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이므로 최선은 여당이 되는 것이고 차선은 제1 야당이 되는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2차 토론회는 권력구조 개편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심상정, 안철수, 윤석열, 이재명 순으로 진행된 입장 발표에서 정의당 심 후보는 다당제 개헌, 중대선거구제, 국회의 국무총리 추천권을 제시했다. 이어 국민의당 안 후보는 분권형 개헌,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주장했고, 국민의힘 윤 후보는 대통령·국무총리·장관의 권력 분점 및 대통령과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정책 거버넌스 방식의 ‘민관합동위원회’를 제안했다. 끝으로 더불어민주당 이 후보는 국회의 비례성 강화와 거국적 국민통합내각 수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음날 한 신문은 “여야 대선 후보들은 선거 뒤 연합정부·국민내각을 구성해 ‘통합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데 폭넓은 공감대를 이뤘다”(한겨레 2월 26일자)라고 총평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 후보를 제외한 세 명 후보의 생각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었을 뿐이다. 이는 아마도 세 사람이 이미 대선 출마 경험을 비롯하여 상대적으로 긴 기간에 걸쳐 축적한 정치적 경륜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작은 정당의 애로사항을 뼈저리게 느꼈을 심 후보와 안 후보는 거의 동일한 문제의식을 표출하였다.

그럼에도 두 차례의 법정 TV토론 모두 안철수 후보가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실 안 후보는 이재명 후보처럼 달변도 아니고 윤석열 후보처럼 지지세가 막강한 것도 아니며 심상정 후보처럼 정치적 신념이 투철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수사(修辭)는 어눌한 편이고 국회의원이 단 세 명뿐인 정당의 원외 대표이며 정치이념적으로도 지난 10여 년간 좌우를 넘나들며 그때그때 자신의 유불리에 따른 정치적 편승과 철수를 반복하여 지탄을 받아왔다. 

그런 그가 타당 대선 후보 3인을 상대로 하여 1차 토론에서는 ‘공적 연금 개혁 공동 선언’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냈고, 2차 토론에서는 ‘정치보복 중단 대(大) 국민선언’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여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이 두 사안은 전 국민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공공선(a public good)’ 또는 ‘더 큰 선(a greater good)’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칫 유력 후보 두 사람의 개인적 공방전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었을 토론회를 안 후보가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약간 부연하면, 안철수 후보는 또 다른 군소정당 후보인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연대하여 대통령선거의 결선투표제 도입, 분권형 권력구조 개편, 다당제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강력히 호소하여 현장에 있던 여당의 이재명 후보로 하여금 일주일 안에 민주당 의원총회를 열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미덕은 “말보다 실천”이며 “언행일치”라고 못 박음으로써 선언된 ‘공약(共約)’에 대한 윤리적 실효성을 담보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었다. 

마침 172석 거대 여당이 ‘다당제 연합정치’니 ‘국민통합 정치개혁’이니 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으니 한국 선거제도의 가장 비민주적인 결함인 승자독식 관행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대선 기간을 통해 우리 시민들 사이에 결선투표제에 대한 공감대도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이 전체 투표의 과반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선거 불복의 정당성과 정치 양극화의 강도도 현저히 약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정의당과 국민의당 후보 모두 완주할 것 같다. 이는 어쩌면 한국 정치판에 ‘다당제’의 토대가 이미 마련됐다는 작은 징후인지도 모른다.

다시 제20대 대선판의 현실로 돌아오면, 종반전에 도달한 이번 20대 대선판도 여전히 ‘도 아니면 모’라는 승자독식의 규칙 아래서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대선 후보들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게임판과 규칙’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행인 것은 후보들 간에 이것의 변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번복될 수 없는 수준으로 예고되었다는 사실이다.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난장판 속에서도 한국정치는 조금씩 진화한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2017), 『한국 민주주의의 새 길: 직접민주주의와 숙의의 제도화』(공저,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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