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보관 그리고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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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보관 그리고 언어
  • 박기수 한양대·문화콘텐츠학
  • 승인 2022.02.22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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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출퇴근 시간에 항상 오디오북을 듣는다. 오디오북으로 듣고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책들은 따로 구입해서 다시 밑줄을 긋고 메모하며 읽는다. 다산 선생의 초서(抄書) 독서법을 본받는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몇 해 되었음에도 아직도 오디오북으로 읽은 것은 쉽게 휘발되는 까닭에 복습하듯 종이책으로 다시 읽으며 메모하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익숙해지니 읽는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지고 다시 읽는 내내 새로운 생각의 단서를 마련할 수 있어 더할 수 없이 좋기 때문이다. 오디오북으로 읽는 것은 전공관련 서적은 거의 없어서 대부분 평소 읽고 싶었으나 부피에 압도되어 엄두를 내지 못한 책들이나 최근 베스트셀러 혹은 특정 테마를 계보학적으로 정리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방학에는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현재 여덟 권중 7권까지 읽고 8권의 오디오북이 공개되길 기다리고 있다. 오디오북으로 다음 권이 공개되길 기대하는 설렘도 좋지만, 책상 앞에 꽂아둔 종이책 여덟 권의 묵직한 포만과 권별로 잔뜩 꽂아둔 포스트잇을 보면서 느끼는 흐뭇함도 더할 수 없이 좋다. 물론 풍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 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김명호 교수의 내공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인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은 중국 현대사를 이끌어온 인물들이 예외 없이 자기 삶을 일기와 편지 등으로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 모든 것을 보관하여 대부분 사후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일기로 기록하여 증거하고, 깊은 속내를 편지로 남겨 내밀한 사적 관계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놀랍지만, 혁명과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기임에도 그 모든 기록을 보관하여 사후에 당연하다는 듯 공개한 점은 더욱 놀랍다. 저자는 중국인 특유의 기록과 보관에 대한 집착에서 원인을 찾지만, 무엇보다 자기 삶의 진실을 남기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삶의 진실에 대한 기록과 보관의 의지가 자신의 역사를 증거 하는 것이며, 그것의 공개는 타자의 기록과 보관을 인정함으로써 상호 비교를 통한 자기가 살아온 시대의 역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재구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일기와 편지는 지극히 사적인 차원의 글이니 온전히 자신만의 언어로 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관점 그리고 대응을 드러내고, 자신의 사후에 공개될 것을 전제하는 까닭에 내포적 의미를 공감 가능하도록 정련된 언어를 선별하여 오해의 여지를 줄이려 했다는 점이다. 그런 일기와 편집에는 고전의 언어를 빌리거나 촌철살인의 압축과 레토릭이 빛을 발하곤 한다. 19세기 말부터 서구로 선진문물을 배우러 떠나는 자식에게 고전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부모가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지 고전을 통해 성현의 지혜를 익히라는 의미 외에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구체적이지만 압축적인 언어를 익혀서 스스로의 삶은 물론 타자를 비롯한 세계를 이해하는 적실한 도구로 활용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에 등장하는 일기와 편지의 기록과 보관만큼 중요한 것이 그것을 구현하는 언어들이다. 언어로 사고하는 인간의 특성을 고려할 때, 구현된 언어의 구체성은 적확한 사고의 다른 이름이고, 촌철살인의 표현은 사고의 정련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기술의 발달로 기록과 보관이 손쉬운 시대가 되었다. 기록과 보관은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행위지만 그 결과는 진실처럼 왜곡되기 일쑤다.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데 핵심인 구체적이고 적확한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구체적인 언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적확한 언어, 타자를 이해하려는 맥락의 언어 등을 꾸준히 익혀야 한다. 그저 몇몇 접두사로 과장하거나 강조하고, 유행어 몇 개로 자신의 감정을 일반화해버리는 우리의 일상이 위험한 이유다.


박기수 한양대·문화콘텐츠학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국제문화대학 학장 및 문화콘텐츠전략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서사의 특성 연구”(2001)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기획창작아카데미 자문위원, KBS 미디어비평 자문위원을 지냈고 UC어바인 방문교수를 다녀왔다. 저서로는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구조와 전략』, 『국경을 넘어서는 애니메이션(アニメは 越境する)』(공저),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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