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정부, 사도광산 정권 유지에 이용…외교문제로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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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정부, 사도광산 정권 유지에 이용…외교문제로 변질"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2.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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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세미나] ‘일본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강행에 따른 대응과 전망’

-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의 사도광산 등재 강행 이후 첫 한일 국제학술세미나

 

                              메이지시대 이후 건설된 사도광산 갱도. 사진=중앙포토

일본의 사도(佐渡) 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 정권 유지를 위한 일본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는 일본 시민단체의 지적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2월 1일에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돼 일했던 니가타현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하고 등재 신청서 제출을 강행함에 따라 “일본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강행에 따른 대응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16일 개최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월 1일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강행하기 위해 추천서 제출을 결의하고 같은 날 유네스코 세계유산 센터에 추천서를 제출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등재 강행에 대응해 외교부를 중심으로 한 정부 유관기관이 참여하는 TF 회의를 개최했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일본 정부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 경과와 문제점, 대응과 전망을 논의하기 위해 라운드테이블 형식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학술세미나에서는 일본 강제동원 네트워크 고바야시 히사토모 사무차장, 정혜경 일제 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등 국내외 전문가가 참석, 일본 정부의 의도와 향후 움직임에 따른 대응 전략을 모색하고자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비대면 방식으로 연 이날 온라인 토론회에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참석해 △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만으로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할 수 있고 △애초에 조선인의 노동은 강제노동이 아니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날 토론회는 비공개로 진행됐으나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해 발표문이 공개됐다. 

고바야시 사무차장은 일본 정부의 세계유산 등재 강행 의도를, 정혜경 대표연구위원은 사도광산 관련 명부에 기재된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의 역사적 사실 규명에 대해 발표한다. 강동진 경성대 교수는 세계유산 등재를 막기 위한 우리 정부의 대응 전략을, 남상구 재단 연구정책실장은 2015년 ‘군함도’ 등 일본 산업유산 등재 당시와 비교하여 향후 대응과 전망에 대해 발표했다.

 

 

▶ 정혜경 (일제 강제동원&평화연구회): <이름을 기억하라: 미쓰비시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에 따르면 사도광산은 1500년대 중반부터 금은 채굴 작업이 이뤄진 광산으로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1,519명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일본이 패전할 당시에는 1,168명의 조선인이 강제노동 중이었다. 사도광산은 에도막부, 메이지 정부가 소유하다가 1896년 미쓰비시합자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1989년 3월까지 채굴이 진행됐다. 현재도 미쓰비시그룹 산하 골드사도가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

정 위원은 강제동원과 관련된 진상규명기관을 상설화해 피해조사, 진상조사를 하고 유네스코 문제에 대응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등 중장기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 위원은 국제 학술연구 네트워크 구축, 관련 기록물의 체계적 관리, 한일 민간 차원의 연구 교류 강화 등을 구체적 과제로 제시했다.


▶ 고바야시 히사토모 (강제동원네트워크):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시도 이유와 경과>

고바야시 히사토모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 차장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한·일의 문제가 아닌 일본 정부의 문제”라며 “세계유산을 정권의 독특한 역사 인식, 가치관을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바야시 차장은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면서 대상 시기를 ‘에도시대’로 제한한 근거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2006년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시동을 걸었을 때만 해도 사도광산은 1596년에 발견돼 1989년까지 약 400년간 조업이 이어진 산업유산으로 주목받았다. 일본 정부가 초점이 바뀐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고바야시 차장은 “애당초 세계유산의 등재에는 시대 구분이 없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의 세계유산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에는 ‘신청서에는 모든 관련 정보가 포함되어야 한다’며 관련 정보 전체를 요구하고 있고, 신청서 어디에도 ‘시대 구분’이라는 항목은 찾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고바야시 차장은 “역사 전체의 설명을 피하고자 사도광산의 가치를 전통 수공업에 기반한 생산 시스템으로 한정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이는 일본 정부가 2015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1910년까지로 한정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던 꼼수와 닮았다”고 설명했다. 고바야시 차장은 이어서 일본 정부가 행정을 사유화해 역사수정주의라는 독자적 가치관을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이 됐으면 좋겠다는 주민의 바람을 왜곡해 ‘역사 전쟁’ 등으로 부르며 정치에 이용하고 외교 문제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했다.

고바야시 차장은 “2015년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이래 세계유산을 정권의 독특한 역사 인식·가치관을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가슴에 블루 리본 배지를 달고 있다. 그들의 역사 인식·가치관은 토대를 역사적 사실에 두지 않고 허구를 사실로 날조하고 자기만족을 채워줄 뿐”이라고 했다.

이어 “이러한 가치관은 ‘인류 전체를 위한 유산’이라는 세계유산의 가치관과 동떨어져 있으며, 세계유산을 자기만의 유산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며 “이러한 정권 아래, 2021년의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채택한 정권에 불리한 권고·결정문은 현 시각에도 일문 번역문 등이 내각 관방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민주화는 지금도 지지부진하고 민주 주권은 형해화되어 그때그때의 권력자가 행정을 사유화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부연했다. 

 

SBS 뉴스 캡처

▶ 강동진 (경성대학교): <일본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따른 대응 전략>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등재 시기를 에도 시대 이전으로 한정한 것의 문제점을 짚었다. 강 교수는 “2015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등재 과정에서 강제동원 논란을 경험한 일본이 당초 시대 구분 없이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다가 실패를 반복한 뒤 2020년 3월 적용시기를 에도시대까지로 수정, 단축했다”면서 “일본 스스로 사도광산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의 사실이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고 메이지시대 이후의 변화에 대한 치명적인 한계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는 탄생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정확하게 설명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바우하우스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졸페라린 폐광산(독일), 근대 건축양식의 기법이 표출된 반 넬레 공장(네덜란드)을 예로 들면서 “특정 시기의 건축양식이 강하게 인지되는 세계유산의 경우에도 산업유산의 탄생에서 중지(소멸)된 현재에 이르는 전체 변천 과정에 대한 가치를 증명했고 입증받았다”라고 설명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유산들 중 시기를 한정해 해당 시대의 산업 특징을 강조하는 유산은 전세계에 10여 점이 있다. 강 교수는 “이들의 공통점은 등재 근거가 한 시대에 국한되거나 강조됐음에도, 등재의 기준이 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정확하게 설명되고 있으며 강조하는 특정 시대의 물증 또한 완벽하게 보존돼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일본 정부가 에도시대 이전으로 시기를 한정한 것은 “강제동원과 관련된 역사 은폐가 주목적”으로 “일본 스스로 사도광산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의 사실이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시기를 축소할 경우 사도광산 최고의 풍경이자 노출광산의 흔적인 ‘도유노와레토’(道遊の割戶)가 등재 대상에 포함되느냐는 논쟁이 예상된다고 했다. 강 교수는 “도유노와레토의 74m에 이르는 V자형의 계곡 형상은 에도시대가 아닌 메이지 시대의 다이너마이트 폭파의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산업유산’ 전문가인 강 교수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ICOMOS) 한국위원회 위원이다.
 

▶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군함도’ 등 강제동원 유산 등재의 문제점과 대응 과정이 남긴 시사점>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나 사도광산의 강제노동이 논점으로 부상할 때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이 일본에서 노동했지만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논리를 되풀이한다고 꼬집으며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연합국 포로도 피해를 본 군함도 등과 달리 사도광산은 한국인만 동원됐고 등재 추진 주체인 사도시와 니가타현이 강제동원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우익단체인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지난 2월2일 산케이신문에 전시 노무동원은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에서 금지한 강제노동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일본 정부가 각의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광고를 실었다. 연구회는 사도광산에 1,519명의 조선인이 동원됐는데 1,000명은 모집이며, 나머지는 합법적 노무동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남 실장은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소개하며, “일본의 식민지배 및 한국인 강제동원 실태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사도광산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징용’이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강제동원 책임을 외면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사도 광산 문제를 논의할 때 용어 선정에 주의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또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이 유네스코가 내세운 가치와 세계유산제도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해 국제연대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이번 등재 추진 대응과 관련해 한국인이 강제로 동원돼 강제노동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각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 토론회에서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강제노동 부정에 대한 반론도 나왔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4월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한국인 동원은 강제동원(연행)이 아니며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에서 금지하는 강제노동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놨다. 한국인이 징용됐고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전시에 이뤄지는 징용은 합법적이었다는 주장이다. 또 국가는 징용에만 관여했을 뿐 당대에 이뤄진 ‘모집’ ‘관알선(관청을 통한 알선)’은 강제노동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강제노동을 ‘처벌의 위협 아래 강요됐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노동’으로 정의한 국제노동기구(ILO)의 판단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학계의 통설과도 충돌한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도 과거에는 모집과 관알선, 징용을 모두 강제동원으로 인정해왔다고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지적했다. 1997년 3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쓰지무라 데쓰오 문부성 중등교육국장이 교과서 검정과 관련해 답변하면서 “모집이라는 단계도 결코 임의로 응모한 것이 아니고 국가의 동원계획 아래 동원된 것으로 자유의사가 아니었다는 평가가 학설 등에 있어서 일반적”이라고 답변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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