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16세기 베스트셀러 작가…브랜드가 된 루터와 독일의 인쇄출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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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16세기 베스트셀러 작가…브랜드가 된 루터와 독일의 인쇄출판업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2.1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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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 브랜드가 되다: 역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의 글쓰기, 인쇄, 출판 전략 | 앤드루 페트그리 지음 | 김선영 옮김 | 이른비 | 528쪽

 

1인 미디어 전성시대다. 페이스북, 인스타, 유튜브 등을 통해 누구나 자신만의 콘텐츠로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 지금의 소셜 매체들은 그만큼 파급력이 크다. 물론 매체라고 하면 전통적인 출판도 여전히 건재한다. 사실 글을 쓰고 책을 내서 하루아침에 이름을 얻는 방식은 역사가 유구하다. 500년 전,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단연 첫손에 꼽히는 사례다.

1440년대 중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한 이래, 반세기가 지난 뒤 그 기술에 힘입어 루터는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오늘날과 같은 출판 풍경을 최초로 빚어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벌부로 상징되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폐단을 지적하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했다. 그것은 작은 학문적 토론의 제안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논쟁을 촉발하며 서구 문명사의 큰 획을 긋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일으켰다.

이 거대한 변혁 운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흔히 인쇄술을 들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루터의 비범한 글쓰기 능력, 실용적 기술의 가능성을 내다본 통찰력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구체적인 노력, 당대 변화하는 인쇄출판 산업의 지형을 폭넓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책은 기존의 신학적 교리적 관점이 아니라 상업적 경제적 관점에서 종교개혁가 루터를 다룬 차별화된 전기다. 제목의 ‘브랜드’는 후자의 측면을 집약하고 있다. ‘루터’의 이름으로 발행된 글은 일단 믿고 읽는, 판매가 보장된 하나의 브랜드 상품이었고, 세련된 편집과 표지 장식이 구현된 하나의 디자인 인쇄물이었으며,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며 이름을 알리고 개혁을 이끈 시대의 아이콘이었다는 뜻이다.

이 책은 루터의 삶과 주요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는 것을 씨실로 삼고, 이 책만의 장점인 루터와 독일 인쇄출판업의 관계를 세밀하게 조명하는 것을 날실로 삼고 있다. 저자는 20년 동안 인쇄술 초기(1450~1600)에 발행된 유럽 전체의 출판물을 조사하여 방대한 자료를 구축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저자의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루터가 파격적인 주장을 하자 비텐베르크와 제국자치도시들의 인쇄업자들은 입맛을 당기며 그의 글들을 활자화하기 시작했다. 신학박사이자 대학교수 신분임에도 개혁운동이 시작될 무렵까지 인쇄된 저술이 없었던 루터는 하루아침에 명사가 되었고, 그의 글에서 상업적 가치를 재빨리 간파한 업자들은 연신 인쇄기를 돌리며 개혁의 이념들을 시장에 쏟아냈다. 결국 독일의 인쇄소들은 루터 개인의 생각을 공론의 장에 펼치고, 나아가 사회 저변에 개혁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알리는 으뜸 기제였다는 것이다.

다소 익숙한 이 시각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디테일에 있다. 인쇄된 루터 저술의 분량과 판본, 출판의 주체와 시기, 루카스 크라나흐가 고안한 새로운 목판 형태 등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당시 인쇄출판계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흔히 대범한 혁명가의 이미지로 인식되는 루터의 색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페트그리가 묘사한 루터는 인쇄된 활자의 위력을 꿰뚫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인쇄 실무에까지 일일이 개입한 꼼꼼한 인물이다.

루터는 인쇄소들을 들락거리며 관찰하고 감독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활자체, 표지 모양, 용지의 크기와 상태, 디자인, 책의 중량 등 기술적·미학적 요소들에 집착하고, 기술력이 떨어지거나 업무에 태만한 자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역량 있는 업자를 데려오려고 애쓰는 루터의 모습은 선 굵은 카리스마적 지도자 이미지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두 번째 논지는 루터가 인쇄술 발달의 일방적 수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루터의 펜이 독자의 구미를 당기는 베스트셀러를 쉼 없이 쏟아냈고, 이는 인쇄출판업계의 변방에 속했던 비텐베르크는 물론 제국자치도시들의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독일 인쇄산업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점을 강조한다. 루터는 다작가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현대의 루터 연구자들은 그의 저술 분량에 압도된다. 루터 관련 1차 사료로 최고 권위를 갖는 ‘바이마르 루터선집Weimarer Ausgabe’은 무려 127권이며, 한 권의 크기와 두께가 일반 서적의 두세 배에 이른다. 1883년에 편집되기 시작한 이 귀중한 사료는 2009년에 그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루터의 글솜씨 또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세련된 표현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근사한 그릇에 담아냈다. 일단 원고가 작성되면 가필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필력을 자신했다.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독일 문학사에서 여전히 하나의 이정표로 평가된다. 왕성한 집필, 유려한 글솜씨, 그리고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은 사업 채산성을 우선시하는 업자들을 움직였고, 루터의 글을 펴내는 일은 판매가 보장된 수지맞는 사업이었다.

비텐베르크의 인쇄기들이 찍어낸 상당수의 서적은 루터의 작품이었다. ‘루터브랜드’가 형성된 셈이다. 변화는 현저했다. 1513년 인쇄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던 비텐베르크는, 30년 후 성업 중인 인쇄소를 다섯 곳이나 두게 되었고, 16세기 말 이 작은 도시는 그동안 독일 출판계를 주도해온 제국자치도시들을 능가하는 출판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로써 생산량에서 이탈리아와 균형을 이루던 독일은 이제 유럽 인쇄출판업의 선두주자로 올라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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