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적 믿음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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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적 믿음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2.13 2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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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의 아편 | 레몽 아롱 지음 | 변광배 옮김 | 세창출판사 | 432쪽

 

사르트르의 고장, 프랑스에서는 21세기 들어 아롱의 복권과 사르트르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왜 프랑스는 갑자기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사르트르를 밀어내고 아롱을 높여 주기 시작했을까? 프랑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 놀라운 현상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운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아롱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자신도 사회주의자로서 ‘좌파 가족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아롱이 좌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좌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 ‘외톨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스스로 ‘추방당한’ 지식인이 되어 ‘고립된 섬’ 같은 처지를 자처했을까? 그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프랑스 지성계는 그를 외면했지만, 그는 끝까지 ‘지식인’으로 남았다.

왜 프랑스 지성계는 다시 아롱을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좌파의 위기로부터 기인했다. 혁명은 이제 그 방향을 바꿨다. 사람들은 총체적 혁명보다는 분자적 혁명을 주장했다. 소련은 몰락했고, 좌파 지식인들은 길을 잃었다. 이러한 좌파 지식인의 실종 상황 속에서, 그들이 그동안 배척해 왔던 아롱을 되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그리고 되돌아본 자리에는 묵묵히 지식인의 길을 걸어간 하나의 위대한 지성이 서 있었다. ‘배반자’ 레몽 아롱의 승리였다.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라는 아편은 사람들에게 폭동을 자극한다. 민주주의의 결점에 대해서는 가차 없으면서도 올바른 교리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최악의 범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지식인들의 태도를 설명하고자 하면서, 나는 곧 좌파,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신성한 어휘들에 부딪히게 되었다. 나는 그것들의 신화에 가해지는 비판을 통해 역사에 대한 숭배를 성찰하게 되었으며, 사회학자들이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하나의 사회 범주에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게 되었다. ‘인텔리겐치아’가 그것이다. 좌파 가족의 일원이었던 내가 그 가족에게 바치는 이 책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나는 그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것은 고립 속에 잠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증오 없이 투쟁할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광장에서의 논쟁을 인간의 운명의 비밀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동조자들을 선택하기 위해서이다.” 

 

‘지식인의 아편’은 ‘민중의 아편’에 대응하는 말로서 공산주의가 바로 지식인의 종교이며 아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롱은 공산주의라는 아편에 취해 있던 프랑스 지식인들을 비판하기 위한 이 책을 세 개의 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정치적 신화”,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 “지식인들의 소외”가 그것이다.

1부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적 신화’란 ‘좌파’,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세 가지 신화를 말한다. 아롱은 이 부에서 역사상에서 통일된 ‘좌파’라는 건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좌파를 자처하는 자 중 도대체 누가 진정한 좌파냐고 묻는다. 또 ‘혁명’은 그 과정에서의 재앙은 사라진 채, 위엄만이 남았다고 말하며, 도대체 어디까지가 혁명이고 어디부터는 혁명이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명’,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하나의 단결된 ‘집단’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는다. 아롱은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는 ‘역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부에서 말하는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를 지엄한 심판대로 여기는, 이른바 ‘역사의 판결’과 같은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에 특정한 ‘길’이 정해져 있다는 계시적 역사관을 말한다. 아롱은 역사에 대한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최종적 의미나 필연성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역사에는 과연 최종적 목적지가 존재하는가? 역사는 과연 누구의 승리를 공언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부인 ‘지식인들의 소외’는 뭔가 동떨어져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신화가 무너지고 역사의 의미가 무너진 자리에는 ‘소외’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롱은 먼저 ‘지식인들과 그들의 조국’ 간의 관계, ‘지식인들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결국 종교를 찾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이상과 다른 조국, 그들의 현실과 다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종교에 기대게 된다. 공산주의는 바야흐로 ‘지식인의 아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대체 누가 공산주의를 추앙한단 말인가? 물론 소련의 몰락 이후로 공산주의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향하거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대체 왜 『지식인의 아편』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롱이 이 책에서 무엇보다 비판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공산주의에 대한 광신적 믿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른바 ‘광신적 믿음’이 공산주의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광신적 믿음은 비판적 사유를 수용하지 않는 일종의 경향이다. 우리가 『지식인의 아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비판적 사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우리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비판적 사유는 오직 내가 아닌 상대편에게 향할 때만이 ‘비판적’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향해서는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마저도 의심했는데, 어떻게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인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비판적이어야 한다. 맹신은 지식인을 침묵하게 하며, 침묵은 사회를 낭떠러지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인간들의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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