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또한 “헨리 키신저의 세기”(Henry Kissinger’s centur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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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또한 “헨리 키신저의 세기”(Henry Kissinger’s century)였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2.1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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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키신저: 외교의 경이로운 마법사인가 아니면 현란한 곡예사인가? | 강성학 지음 | 박영사 | 848쪽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드라마 「Tempest」(폭풍)의 주인공 프로스페로(Prospero)는 지식을 통해 습득한 힘, 즉 자연의 힘을 조작할 수 있는 자신의 마법을 사용하여 자기의 왕국을 차지하려 드는 무도한 자들의 모든 기도를 좌절시키고 오히려 그들 간의 화해와 협력을 이룩한 뒤 자신의 마법을 버린다.

학자-외교관(scholar-diplomat)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는 마치 20세기의 마법사 프로스페로처럼 자신의 막강한 지적 자본을 사용하여 20세기 후반 국제정치의 평화를 위한 구조적 질서를 구축했다. 

20세기는 누가 뭐라 해도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2001년 미국의 본토에 대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기는 미국의 거대한 확장과 위대한 성취의 기간이었다. 미국은 항상 확장해가는 기업의 역동적 중심지였고 인류의 기술적 봉사자들의 훈련 센터였으며 자칭 지구적 “좋은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이었다. 자유국가들 중 미국만이 폭군의 무력에 대항하여 지구적 안전을 보장했다. 오직 미국만이 자기 정체성을 위해, 즉 자기발전과 자존을 위해 투쟁하는 다른 인민들을 고무할 힘과 품위를 모두 갖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는 민주국가들이 가장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던 1930년대를 독일에서 경험했고 미국이 인류의 희망을 구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수십 년 동안 그 사명에 동참했다. 즉, 그는 파시즘을 파괴하고 적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수립된 신군사제도들을 실천한 개척자적 세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전후 도전들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학문적 계획의 수혜자였으며, 지구적 대전략을 수립하는 새 전문가 세계의 일원이었으며, 그리고 냉전을 수행할 권력이 부여된 정책결정기구들에 속했다. 미국 국력의 성장은 광범위한 미국의 행위자들 사이에 영향력의 분배를 의미했다. 키신저는 새로운 힘의 중심지들을 통해 활동하면서 미국의 세기에 기여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었고, 키신저 자신의 표현대로, “미국의 세기의 자식”(a child of the American Century)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20세기는 또한 “헨리 키신저의 세기”(Henry Kissinger’s century)였다.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한 후 19세기 전반기 동안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 수상이 당시 최초의 “유럽의 수상”(The Prime Minister of Europe)이라고 불렸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20세기 중반기 세계적 긴장완화(detente)를 추진했던 키신저의 마법사 같은 국제정치의 관리와 외교력으로 인해 당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가 “미국외교정책의 대통령”(the President of American foreign policy), 혹은 더 나아가서 “지구의 대통령”(the President of the planet earth)이라고 칭송되었던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었다.

키신저는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역사상 수많은 국무장관들 중 제56대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미국 행정부의 권력구조에서 제2인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외교적 마법”을 사용하여 한때나마 “지구의 대통령”으로까지 인식되고 또 그렇게 칭송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시 키신저의 “군주”였던 제37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신임과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그의 권위 상실과 외교정책의 문외한인 제38대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대통령의 전폭적 신임의 덕택이었을까?

그에겐 분명히 그런 행운의 요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거의 대부분이 그의 탁월한, 창조적 리더십의 결과라고 보아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바로 그런 키신저의 탁월한 리더십의 발휘과정과 그 비결을 밝혀보려는 것이다.

키신저는 1938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온 뒤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지아이 빌(GI Bill)의 덕택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탁월한 학문적 재능으로 필적할 수 없는 지적 자본을 축적했고, 또 그곳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정치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케네디와 존슨의 행정부 시기에 그는 계속 권력의 외부인으로만 머물다가 1969년 마침내 닉슨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비로소 권력의 내부인이 되었다.

바로 그때부터 키신저는 마치 경이로운 마법사처럼 당시 치열한 미-소 초강대국들의 정면 대결로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던 냉전시대에 4반 세기 만에 죽의 장막을 뚫고 미-중의 관계 개선을 이루고, 소련 제국의 철의 장막을 넘어 미-소 간의 데탕트를 구축하여 국제적 3각(tripolar)체제, 즉, 보다 안정적인 정치외교적으로 다극적(multipolar)인 새 국제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미국을 기나긴 베트남 전쟁의 질곡에서 마침내 탈출시켰다.

그는 또한 당시 전쟁 중인 중동과 내전 중이거나 내전의 발발이 위협하고 있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창조적인 왕복외교(shuttle diplomacy)를 통해 마치 현란한 곡예사처럼 중동에서 소련을 추방해버렸고,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다수인 흑인통치의 원칙을 채택하고 그것의 구현을 위한 시도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미국을 경계하고 심지어 적대적이었던 검은 대륙의 국가들이 미국을 다수인 흑인들의 통치를 위한 세력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주어진 비교적 짧은 기간에 모두 이루었다는 것은 20세기 후반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세계사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본서는 바로 그런 키신저의 역사적 드라마를 생생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헨리 키신저는 그의 탁월한 지성과 놀라운 재능으로 20세기 후반에 경이로운 마법사이며 동시에 현란한 곡예사 같은 역사창조의 외교사에 접근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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