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있고 윤리적인 기술진보라는 중도의 길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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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있고 윤리적인 기술진보라는 중도의 길은 가능할까?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2.1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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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놀로지의 정치: 유전자 조작에서 디지털 프라이버시까지 | 실라 재서노프 지음 | 김명진 옮김 | 창비 | 396쪽

 

과학기술과 인간, 사회의 상호작용을 탐색하는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의 개척자인 저자 실라 재서노프가 유전자 조작에서 디지털 프라이버시까지, 눈부신 과학기술의 진보를 일구어온 인류가 새롭게 맞닥뜨린 윤리적·법적·사회적 곤경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집요하게 풀어냈다. 그는 우리가 선호하는 기술은 지나친 이익과 편의 지향으로 인해 관리 및 통제를 지향하는 기술, 즉 ‘오만의 기술’이었음을 지적하고 불평등의 해소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겸허의 기술’을 제안한다.

이 책은 그가 안전·보건·환경 규제, 생명윤리, 특허 분쟁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논쟁적 이슈들에 대해 실행한 국가 간, 문화 간 비교 분석을 집대성한 결과다.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인 인도 보팔 가스누출 참사와 생명윤리 논란을 낳고 있는 맞춤아기, 대리모 산업의 사례를 조망하는 한편, 위키리크스 사건과 에드워드 스노든 사건을 들어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디지털 혁명 속에서 프라이버시와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 법과 제도의 차원에서 논한다. 기후위기 등 환경재난과 인간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전쟁, 테러에 시달리고 있는 인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 모른다. 어두운 전망 속에서 과연 책임있고 윤리적인 기술진보라는 중도의 길은 가능할까? 이 책은 우리가 STS, 즉 과학기술학이라는 낯선 학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호소력 있게 역설하며, 과학기술의 진보가 민주적 통제의 대상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비판적으로 해부되어야 할 정치의 장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기술진보는 분명 매력적이다. 기간산업에 투자해 농업 중심이던 경제를 빠르게 산업화하고 아시아의 4대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성장한 경험이 있는 한국에서는 기술혁신이 진보의 강력한 동인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다. 기술 자체가 공공선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믿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저자는 기술진보의 이면을 비추는 여러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잘 이용한다고 믿은 기술이 실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술이 우리 삶을 더 낫게 바꿔주리라는 무조건적인 통념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대적으로 새로운 학문 분야인 STS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이 법, 제도, 그리고 인간의 삶과 만날 때 도출되는 논쟁적 지점들을 면밀하게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2장 ‘위험과 책임’과 3장 ‘재난의 윤리학’에서는 기술혁신이 수반하는 각종 위험과 산업재해의 사례를 살피면서 그것이 어떻게 관리되고 무시되는지 질문한다. 이런 사건의 재발을 철저히 방지하고 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가치나 경제적 편익뿐 아니라 지구 환경과 사회정의까지 고려하는 윤리적인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4장 ‘자연을 다시 만들다’와 5장 ‘인간에 대한 조작’에서는 유전자 조작, 생의료 과학기술의 진보가 제기하는 윤리적·도덕적 질문들을 탐구한다. 6장 ‘정보의 거친 첨단’에서는 디지털혁명 속에서 프라이버시와 사상의 자유에 드리워진 위기의 그림자를 묘사한다. 과연 사이버공간은 자유로운 장소인가? 저자는 제도의 미비함을 인정하고 헌법과 같은 기존의 법적·윤리적 개념틀이 온라인상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신장하고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7장 ‘누구의 지식이고, 누구의 재산인가?’에서는 지식재산권 문제로 눈을 돌린다. 인간의 몸에서 분리한 유전자로 실험을 할 때 그 결과물은 누구의 소유인가? 저자는 자유로운 과학 탐구의 이상과 지식을 독점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규칙들을 검토한다. 특히 필수의약품에 대한 특허를 엄격하게 강제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통제하는 제약산업의 힘을 숙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백신과 치료제를 어떻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할지 현명한 판단을 요하는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특히 뼈아프게 와닿는 대목이다.

8장 ‘미래를 되찾다’와 9장 ‘사람을 위한 발명’에서는 과학기술의 통제와 거버넌스의 문제를 탐구한다. 저자는 그간 과학기술의 힘을 관리하는 데 참여한 이들이 주로 기술관료들이나 과학자, 금융가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반면 대중들은 무력한 소비자로만 정체화될 뿐 기술진보의 방향에 대해 전혀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는 과학기술이 법과 제도만큼이나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득과 부담을 분배하는 권력의 통로이자 강력한 거버넌스의 수단임을 강조하며, 기술 통치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힘을 자본과 산업, 그리고 대의제의 정치적 대리인들에게서 환수해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선택을 가능케 할 의지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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