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행복: 21세기에 『실천이성비판』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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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행복: 21세기에 『실천이성비판』 읽기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10.25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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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7강〉_ 정대훈 한국산업기술대 교수의 「칸트 〈실천이성비판〉」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1. 서양사상 제 7강 정대훈 교수(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자유와 행복: 21세기에 『실천이성비판』 읽기


정대훈 교수는 칸트의 시대적 과제가 “거의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가지 않고도 당시의 회의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식과 실천의 확고하고도 새로운 토대를 정립하는 것이었다”면서 칸트의 저서 『실천이성비판』이 그 “과제를, 윤리의 영역에서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구별하되, 경험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별 행위를 규제하는 선험적인 기준을 행위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 안에 확립함으로써 완수하고자” 했다고 평한다. 결과적으로 “칸트가 윤리학에 가져온 근본적인 변화”란 다름 아닌 “기본 물음의 변화”인데 이는 ‘무엇이 좋음·가치·행복을 누릴 자격을 부여하는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이때 “자격 부여의 원천이 바로 자유”가 되며 그 “자유는 행복을 향한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같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는 행복의 자격 조건을 이룬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칸트의 윤리학이 “결코 최상선에 머물러 현실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선인 덕의 기준에 알맞은 행복이 결합된 최대선을 지향한다”라고 보면서 21세기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아 “인간이 행복만을 추구하는 “정신 자동기계”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실천이성비판’은 21세기에도, 아니 21세기에 들어 더욱더,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9월 4일, 정대훈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칸트의 시대적 과제와 초월론적 기획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은, 다른 모든 사상서들이 그렇듯이, 시대의 산물이다. 즉, 각각의 저작은 인식과 실천의 영역에서 칸트가 자신의 시대와 사상적으로 대결하여 얻어낸 성취물이다. 실체, 인과 등 대상 세계 인식의 기본 범주들이 반복된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습관의 결과일 뿐이라는 데이비드 흄의 자연주의적 사상은 우리의 경험적 인식과 학문적 인식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또한, 토마스 홉스는 완전한 만족의 상태인 ‘최고선’이란 허황된 개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윤리학의 전통적 핵심 개념인 행복이란 불확정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며 하나의 욕구 충족으로부터 다른 욕구 충족으로의 끝없는 과정일 뿐이라고 주창했다. 이로써, 근대 세계는 근대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불살라버렸다. 칸트가 시대적 과제로 삼은 것은 과거의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가지 않고도 당시의 회의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식과 실천의 확고하고도 새로운 토대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실천이성비판』은 이 과제를, 윤리의 영역에서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구별하되, 경험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별 행위를 규제하는 선험적인 기준을 행위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 안에 확립함으로써 완수하고자 했다. 이는 『순수이성비판』이 인식의 영역에서 양자를 구별하되, 경험적 인식의 선험적 성립 조건을 인식 주관 안에서 탐구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두 저작에서 ‘비판’이 사용된 맥락은 칸트도 명시하고 있듯이 정반대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신 영혼 우주 전체 등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았던 ‘순수한 이성’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경험을 넘어선 이러한 초월적(transcendent) 대상들은 인간 이성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순수 이성은 경험적 인식을 위한 경험 이전의, 즉 선험적인 조건을 인식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 인식을 위한 선험적 조건을 초월론적(transcendental) 조건이라고 부르고 이 조건에 대한 인식을 초월론적 인식이라고 부른다. 인식의 영역에서 (경험적 대상과 무관하게 추구되는 수학적 기하학적 인식을 제외하면) 선험적인 것은 오직 대상 경험이 성립될 수 있는 초월론적 조건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제까지의 철학은 신 영혼 등의 초월적 대상을 마치 경험 대상인 것 마냥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식을 추구하는 순수 이성은 월권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의 요지이다. 

『실천이성비판』은 실천의 영역에서 이러한 순수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사정은 정반대다. 이제까지의 철학은 행위의 규범적 원칙을 순수하게 선험적인 것에서 찾지 못하고 경험적인 것에서 혹은 기껏해야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는 곳에서 찾았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엄격하게 보편적인 실천 원칙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경험은 경험적 일반성, 오늘날의 용어를 쓰자면, 통계적 일반성만을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에 의거한 행위 원칙, 경험적 실천 원칙을 수립하려고 하는 실천 이성은 비판되어야 하고, 순수한 이성에 의해 수립된 보편타당한 실천 원칙이 가능한지 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의 과제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의 ‘머리말’에서 이를 간략히 이렇게 밝힌다. “이 논고는 [순수 실천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 의도에서 그것의 전 실천적 능력을 비판한다.”(V3/35쪽) 이 저작의 두 과제는 순수 실천 이성 및 순수 실천 원칙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경험적인 것과 혼재되어 있는 실천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이성비판』은 경험을 초월하려는 순수 이성을 비판하고 경험의 조건으로서만 선험적인 것을 다루지만, 『실천이성비판』은 경험적인 실천 이성을 비판하고 경험적 차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순수 실천 이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두 비판서는 이렇게 서로 반대 방향의 진행을 보여주지만, 양자는 칸트 철학의 동일한 기본 프레임 안에서 진행된다. 즉, 이제까지의 철학이 인식과 실천의 두 영역에서 공히 그 기준과 척도를 대상에서 찾았다면, 칸트는 발상 전환을 통해 그것을 주관/주체에서 찾았다. 이로써 그는 인식 조건 및 실천 규범의 필연적 타당성을 경험 이전에 인식과 행위를 위해 주관/주체에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는 순수한 것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인식과 실천의 선험적 조건 혹은 규범은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개념적으로 구상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칸트는 보통의 인간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장미는 빨갛다’라는 경험적 인식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나의 이익을 위해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속을 어긴 사람을 비난하며, 도둑질한 행위에 대해 당자사의 책임을 묻는다. 칸트는 일상의 사실적 현상들인 경험적 인식과 실천적 판단의 보편적 조건과 원리를 개념들을 통해 분석적으로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 칸트는 이러한 인식적 실천적 사실들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주관/주체 안에 선험적이고 순수한 조건들이 내재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주관/주체 내재적인 이 조건들은 직접적인 경험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과 실천의 초월론적 조건으로서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인식의 영역에서 이 조건은 시간과 공간의 선험적 직관 및 지성의 개념적 범주들이며, 실천 영역에서의 그것은 자유이다. 그리하여, 실천의 원리로서 순수한 실천 이성이 수립하는 행위의 법칙이 확립된다면, 자유 역시 이 법칙의 토대로서 확립된다. 자유 개념이 자신의 체계에서 담당하는 핵심적 기능에 대해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자유 개념은 … 순수 이성의 … 체계 전체 건축물의 마룻돌을 이룬다.”(V3/37쪽) 

 

2. 전통적 실천 원리로서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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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칸트의 행복관 

17세기 중반에 표명되기 시작한 감각적이고 불확정적이며 가변적이고 과정적인 행복관은 대략 한 세기 후가 되면 하나의 ‘상식’이 된다. 칸트 역시 ‘무엇이 행복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홉스 이래의 근대적 행복관을 따른다. 감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에게는 행복이 전부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이 끝없이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도 받아들인다. 이 점을 칸트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다. 인간은 결코, 고대의 스토아주의자들이 생각했듯, 자족의 상태,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완전한 만족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한한 존재,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끝없이 자기 바깥의 무엇인가가 필요한 존재이다. 행복은 완전히 충족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칸트 역시 행복은 미규정적이고 각자성과 개인성을 가진다는 점을 거론한다. 

4) 행복의 공통 척도로서의 쾌 

행복은 다양하고 개인마다 다르다. 그러나 근대 이전이나 근대에 들어서나 모든 행복을 관통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쾌(快)다. 모든 행복은 쾌를 공통의 특질로 가진다. 이를 쾌락, 즐거움, 기쁨 등 유사한 다른 명칭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은 우리 마음에 야기된 혹은 유지되는 쾌 혹은 기쁨의 상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경험적-심리적 차원을 가진다. 칸트 역시 경험론적 전통에 충실하게 그리고 나중에 등장할 공리주의적 전통을 예견하며, 내용적으로 확정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기본 요소를 ‘쾌’로 간주한다. 

쾌를 기본 요소로 갖는 한 모든 행복은 더 이상 종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다. 또한, 칸트가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쾌는 동종성을 갖기 때문에 여러 행복들 간의 비교를 통한 선택이 가능하다. 쾌의 강렬함, 지속 시간, 획득의 용이성, 발생의 반복 빈도 등이 그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런 기준에 따를 때 반드시 ‘저급하고’ 일상적인 쾌가 선택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책 읽기, 글쓰기 혹은 고강도 운동에서 얻는 기쁨이 식욕 충족의 쾌보다 더 강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항상 보다 강렬한 쾌를 선사하는 행복이 선택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얻기 어려운 강렬함보다는 얻기 쉬운 평이함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위의 여러 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행복을 비교ㆍ선택하게 된다. 

 

3. 심리적 자유와 “정신 자동기계” 

그런데, 칸트에게 행복은 실천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실천의 원리를 제공하는 것은 자유이다. 왜 행복은 실천의 원리가 될 수 없는가? 

모든 행복의 공통 특질은 쾌라고 했다. 행복의 또 하나의 공통 특질에 대해 생각해보자. 행복에 수반되는 쾌락과 기쁨은 우리 안에서 느껴지고 경험되는 것이다. 즉, 행복은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의 문제, 주관적이고 내적인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다양한 쾌의 경험을 선사하는 행복들을 서로 비교하고 그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진정 자유로운 행위인가? 외적인 강요 없이 여러 항목들 중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선택은 아무런 문제없이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부정적인 쪽이다. 그 이유를 분명히 알려면 우선 인과의 두 가지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물리적 인과성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 인과성이다. 물리적 인과성은 물리적 원인이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고, 심리적 인과성은 우리 마음의 관념, 칸트의 용어로는 “표상(representation; Vorstellung)”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런데, 표상을 통한 이러한 심리적 인과성을 고찰해보면, 행복의 ‘자유로운’ 선택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사정은 다음과 같다. 행복과 관련한 선택은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되는 특정 대상을 표상하고 아직 나의 소유가 아닌 이 대상을 취득하려는 행위 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것을 존재하게 만들려는 행위를 실행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행복 추구에서의 선택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고 간주한다. 물론, 이 경우 우리의 행복 추구 행위는 물리적 운동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심리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의 표상이 개입하기 때문에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를 “심리적 자유”라고 부른다. “지나간 시간의 필연적 조건들…은 그러므로 심리적 자유—만약 사람들이 이 말을 마음의 표상들의 순전히 내적인 연쇄에 대하여 사용하고자 한다면—를 수반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연 필연성을 수반하는 것이다.”(V96/ 212쪽) 이런 의미에서 물리적 원인에 따른 행동이든 표상적 원인에 따른 행동이든, 칸트는 모두 ‘기계적’이라고 칭한다. 저마다 다른 행복의 표상에 따라 ‘자유롭게’ 취해진 각 행위들은 심리적으로만 자유로 느껴질 뿐, 실제로는 자연법칙적 인과성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4. 칸트의 양립주의 

행복 추구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비교와 선택의 행위들은 거기에 심리적 표상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시간상에서 일어나는 한 선행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적 사건, 즉 자연법칙적 필연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자연적 사건으로서의 인간 행위에 대해, 그것이 자신의 행위라면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라면 그것의 책임을 지운다. 이것은 범주 착오의 오류인가? 인간의 행위는 자연 사건인가, 아니면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이 양자택일의 물음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둘 다 맞다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행위들은 자연의 인과적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루어진 각각의 행위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책임귀속의 근거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 행위 대신 다른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인간사의 기본 사실에서 출발한다. 칸트는 실천의 영역에서도 인간사의 기본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책임을 묻는다. 우리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의무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품는다. 『실천이성비판』의 기본 물음은 ‘우리가 책임을 지고 묻는 인간적 현상, 의무감과 존경심을 품는 현상은 어떤 전제 조건 아래에서 성립하는가’이다. 어떤 행위에 대한 책임감, 의무감, 존경심의 가능 조건은 다른 행위의 선택 가능성 및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이다. 

그런데, 행복과 관련한 우리의 선택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단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직접 경험되거나 의식되는 심리적 내용은 시간상에 놓이는 것으로서 그에 선행하는 다른 어떤 것을 원인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경험에 직접 드러나는 것일 수 없다. 자유의 우선적인 부정적 특징은 현상들의 조건적 인과 계열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유에 대해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제기되는 문제는 ‘어떻게 이 자유가 심리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면서도 입증될 수 있는가?’이다. 

 

5. 의무감과 존경심: 자유를 입증하는 감정들 

우리는 우리에게 불쾌와 고통을 가져다줄 행위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모조리 장단기적으로 우리에게 쾌와 행복을 가져다주고 불쾌와 고통을 회피케 해주리라고 기대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쾌와 불쾌 행복과 고통의 표상이 원인이 된 행위의 실행 혹은 포기는 결국 자연적 인과법칙의 계열로 환원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거개의 행위들은 쾌와 불쾌의 계산법, 행복과 고통의 대차대조표를 통해 이루어지거나 중단된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하는 것들 중에 결코 나중에라도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행위로 추동하는 동기를 이루는 것이 있다. 이것은 쾌와 불쾌의 계산법에 의해 이해될 수 없는데, 바로 의무감이다. 

우리는 명백히 부당해 보이는 곤경에 처한 결백한 사람을 보면 그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그 결과, 죽음이 그 결과로서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로 간주되기 때문에 현재의 행위를 선택하여 실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비록 이것은 인간에게 매우 어렵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 쾌/불쾌의 계산법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물론, 그의 행위는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선택에 연달아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시 엄격한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따른다. 하지만, 그는 쾌/불쾌의 계산법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적 인과성의 한 계열을 중단시키고, 다른 하나의 인과적 계열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즉, 이러한 선택과 행위를 통해 그는, 심리적-경험적 자유가 아닌, 절대적 자발성으로서의 자유를 실행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새로운 하나의 인과적 계열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자유의 능력이다. 

의무감은 모든 행복 및 쾌와는 종류가 다른 행위의 동기이다. 우리 마음에 짐을 지우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행위하도록 촉구하는 동기의 역할을 하는 의무감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위대한 것 앞에서 짓눌려지는 감정을 포함하는 존경심이 있다. 이러한 의무감이나 존경심은 행복이나 쾌와 반대되는 감정들임에도 불구하고 행위 동기의 기능을 한다. 이 감정들은 쾌 혹은 불쾌, 행복 혹은 고통에 대한 표상과는 무관하게 우리를 행위로 추동한다. 비록 우리가 이 감정들이 추동하는 행위를 언제나 실행에 옮기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감정들의 추동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가능한 일로 남아 있다. 

다른 거개의 감정들이 우리의 행복 추구 질서에 속하는 반면, 이렇게 의무감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은 행복과 쾌의 표상, 나아가 자연법칙적 필연성에 종속되는 모든 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이 이종적 원인이 자유이다. 의무감과 존경심은 이렇게 자연적 질서 안에서 새로운 인과적 계열을 시작하도록 촉구하는 우리 안의 적극적 원인으로서의 자유를 입증한다.

 

6. 행복의 경험적 일반성과 도덕 법칙의 보편적 필연성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보편적 규정은 근대에 들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짐을, 또한 행복은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서, 행복의 추구는 ‘각자의 일’이 됨을 살펴보았다. 이럴진대, 행복은 실천의 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행복은 무엇이 자신에게 행복감을 주는가에 대한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대상 관련적이고 대상 의존적이다. 

따라서 행복에 대해서 어떤 내용적 일반성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대상 경험의 수준에서 말할 수 있는 일반성, 경험적 일반성의 수준에서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일반성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소간 변동을 겪는 일반성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일반성 때문에 특정 주체가/주체들이 행복을 추구할 때 일반적 지침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행복이 가지는 경험적 일반성의 또 다른 측면은 행복의 원리는 조건적인 보편성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의 경험적 일반성은 특정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특정 기술적 숙련성이나 현세적 영리함을 필요로 한다. 이 특정 기술들과 세상을 사는 지혜들은 일반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것들을 그때마다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에 반하여, 무엇이 의무이고, 무엇이 윤리적인지는 모두가 배우지 않아도 이미 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이미 경험하는 바이다. 칸트는 이런 자명한 실천 규칙들을 도덕 법칙이라고 부른다. 자연법칙이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을 지니고 있듯이, 이런 규칙들은 실천적인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행위의 동기에서 나 자신의 행복과 쾌락,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 오로지 의무감에 따라서 행위 하고자 하면 이는 누구에게나 타당한 실천 법칙에 따르는 행위가 된다. 즉, 행위가 의거하고 있는 준칙이 포함하고 있는 목적, 대상, 질료의 주관성과 특수성을 추상하고 나면 내가 따라야 할 행위의 법칙이 도출된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이론적 개념적 언어로서 실천 법칙의 도출 과정을 정식화할 때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다만, 보통 사람들이 이미 일상적 현실 속에서 의무감, 존경심, 책임감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고 느끼는 윤리적 현상 혹은 사실을 개념적으로 분석하여 보다 명료히 할 뿐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우리가 의무감, 존경심, 책임감을 느끼며 이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보편적 실천 법칙에 따라 행위해야 함을 느끼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이러한 감정들에 의해 추동될 때 어떠한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느끼는지를 분석적으로 개념화한다. 이것이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는 “정언 명령”으로,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으로 명명되는 것이다. 

칸트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낄 때 우리는 보편적 실천 법칙인 도덕 법칙을 직접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이, 우리에게, 정확히 말해 우리의 이성 안에 내재해 있지만, 그 자체로는 자연적 인과 관계를 따르는 현상으로서는 경험될 수 없는 자유를 입증하는 근거이다. 우리의 순수한 이성은 자유를 통해 도덕 법칙을 수립하고 우리의 심리적 자아는 이렇게 수립된 도덕 법칙을 의식하며 의무감, 책임감, 존경심을 느낀다. 우리에게 도덕 법칙의 의식이 없다면 자유는 인식될 수 없고, 자연 안에 새로운 인과 계열을 시작하게 하는 이 자유가 없다면 도덕 법칙도 존재할 수 없다. 칸트는 이를 간단히 “자유는 … 도덕 법칙의 존재 근거이나, 도덕 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V4 각주/37쪽)라고 말한다.

 

7. 행복할 자격의 원천으로서의 자유 

자유는 경험되지 않는 초감성적 이념이다. 자유는 이러한 이념으로서 “절대적 자발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자유는 현실을 초월하여 현실과는 분리된 영역에 존재하는 그 무엇, 경험적 현실이 존재하지 않아도 외따로 존재하는 초험적인(transcendent) 그 무엇이 아니다. 자유는 초감성적-선험적 이념이지만, 감성적 경험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 없이는 무의미하다. 자유는 경험적 현실에서의 실천을 조건 짓고 규제하는 초월론적(transcendental)인 것이다. 그는 이론 이성의 영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도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혼동하는 것을 비판하고 그 둘을 서로 이종적인 것으로서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나 이 비판적 구별은 분리나 단절 혹은 사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 비판되는 것처럼, 칸트의 윤리학은 경험적 현실을 경시하거나 추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자연적 경향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 

그는 실천의 원칙으로서 경험적 현실에 대해 보편적 규제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을 선험적인 것에서 찾을 뿐이다. 경험적인 것의 선험적 조건을 칸트는 ‘초월론적’이라고 정의했다. 이 경험적 실천을 보편적으로 규제하는 조건인 도덕 법칙의 원천인 이 선행적인 자유가 바로 초월론적인 자유이다. 이 자유로부터 성립하는 도덕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행복의 추구도 긍정의 대상이다. 

칸트가 윤리학에 가져온 근본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은 기본 물음의 변화에 있다: 전통적인 윤리의 문제는 ‘무엇이 (가장) 좋은가’, ‘무엇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무엇이 (가장)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등이었다. 칸트의 윤리학에 이르러 윤리학적 물음의 기본성격이 바뀌었다. 칸트는 ‘무엇이 좋음ㆍ가치ㆍ행복을 누릴 자격을 부여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자격 부여의 원천이 바로 자유이다. 자유는 행복을 향한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같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데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유는 행복의 자격 조건을 이룬다. 『실천이성비판』이 출간되기 10여 년 전에 작성된 한 메모에서 칸트는 이미 이렇게 적는다. “자유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좋음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된다.”

모든 인간—그리고 인간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모든 존재—은 이미 이 자격 조건을 최소한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유는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 자유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 왜냐하면 의무감, 존경심, 책임감 등의 감정과 다른 것이 아닌,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우리 안의 자유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8. 덕(德): 행복할 자격의 완성 

자유는 우리의 이성에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어서 도덕 법칙을 수립하게 하고, 이 법칙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이에 따라야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자유에 의해 수립된 법칙의 실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실행의 능력이 함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는 함양되어야 할 이 능력 혹은 힘을 덕(德)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도덕 법칙에 항상 그리고 완전히 부합하게 행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한 부분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욕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덕 법칙에 대한 의식은 인간에게 의무감, 책임감, 존경심과 같은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도덕 법칙에 따르는 일은 인간에겐 언제나 당위일 수밖에 없다. 이 당위에 부응하는 힘이 바로 덕이며, 덕은 인간이 자유롭게 실천 법칙을 수립하는 존재인 동시에 행복을 바라는 감각적 존재라는 내재적 긴장 관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와 행복의 두 항은 동등한 높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에 의해 수립된 법칙과 이 법칙을 따르는 힘으로서의 덕이 행복을 허용하거나 제한하는 상위의 기준이다. 자유, 실천 법칙, 덕은 이러한 의미에서 최상위의 선을 이루는 한 세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보아온 대로 이 최상의 선은 행복이라는 또 다른 선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칸트는 자유에 의한 법칙을 실행하는 덕에 알맞은 정도의 행복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의 두 번째 파트인 ‘변증론(Dialektik)’의 주요 내용이다. 칸트 윤리학이 행복을 배제ㆍ사상한다고 오해하는 이들은, 칸트가 일관되지 못하게도 행복을 다시 자신의 이론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이 파트를 비판해왔다. 

그러나 ‘자유는 행복할 자격의 원천’이라는 자신의 기본 사상의 일관된 틀 속에서 칸트는 ‘변증론’에서 자유의 법칙을 실행하는 덕을 보여준 사람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 적합한 정도의 행복이 주어져야 한다는 한 발짝 더 나아간 주장을 한다. 덕이라는 최상위의 선만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데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위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칸트는 이렇게 의무감에 따라 행위한 덕을 보여준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행복이 주어져야 함이 또 다른 당위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실행된 덕들에 걸맞은 정도의 행복이 보장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덕과 행복이 잘 결합된 상태를 칸트는 전통적인 윤리학의 용어인 최고선(summum bonum)을 빌려와 개념화한다. 우리는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덕과 행복이 결합된 이 상태를 ‘최대[大]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라틴어 summum이 가진 중의적 의미 때문에 가능하다. 이 단어는 ‘최상’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최대’, ‘총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칸트의 윤리학은 결코 최상선에 머물러 현실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선인 덕의 기준에 알맞은 행복이 결합된 최대선을 지향한다. 

 

9. 맺음말: 21세기의 『실천이성비판』 

우리 시대의 화두 중 하나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산업 생산, 자동차 운전, 의료적 진단과 처방, 단순 서비스업 및 법률적 의사 결정과 같은 고도의 서비스업, 체스나 바둑 등 복잡한 지능이 요구되는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추월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대체ㆍ능가할 수 있는 것은 개별 인공지능의 정교하게 구성된 알고리즘이 막대한 양의 경험적 데이터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가를 더욱 추동하는 것은 경험 데이터에 기반한 학습을 통해 인공지능이 자신의 알고리즘을 상당히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원리상으로 인간 지능의 거의 모든 분야가 인공지능에 의해 외부화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지능이든 인공지능이든, 지능이 사용되는 것은 인간의 이익과 행복,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앞으로는 점점 더 인공지능이 인간의 행복을 충족시키게 될 것이다. 신속하게 업그레이드되는 알고리즘과 처리 가능한 경험적 데이터의 양 덕분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행복을 인간의 지능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그리고 더 멀리까지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개인의 경험적 데이터가 확보된다면, 인공지능은 각자의 행복이 무엇인지, 그것을 충족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그 스스로 알아내는 것보다 더 잘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공지능의 봉사를 받으면서 인간 자체가 데이터가 되어버릴 위험을 경고한다. 사실, 인간이 오로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인간이 자기 보존 기계 혹은 행복 추구 기계일 뿐이라면, 인간은 자연법칙적 필연성과 경험-통계적 일반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데이터가 될 위험은 분명 열려 있다. 대신, 인공지능은 인간 자신은 내다볼 수 없는 인간 행복의 먼 미래까지 계산하여 알고 있는 유사 신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인공지능과 연결하여 극대화된 자신의 정신적ㆍ신체적 능력을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는 소수의 엘리트 계층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쓸모없는’ 대중으로 나뉜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에서 엘리트는 ‘자유롭고’ 대중들은 ‘예속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값비싼 행복을 구매할 수 있는 자들과 값싼 행복에 만족해야 하는 자들일 뿐일 것이다. 값비싼 행복을 누리든 값싼 행복에 만족하든, 모두는 누적된 경험적 일반성과 자연 필연성의 차원에 구속되어 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러한 예측과 상상을 배경으로 하여 더 확연해지며 뚜렷한 현재성을 얻는다. 인공지능 시대의 ‘실천 이성’은 알고리즘에 의해 외부화되는 행복 계산의 메커니즘이다. 이것은 경험에 주어진 데이터에 따라 그때그때 바뀌는 행위의 대상적 목표를 제시한다. 이러한 지능으로서의 ‘이성’은 경험적 일반성에 기초한 행위 전략을 산출해 낼 뿐, 행위의 보편타당한 원칙, 즉 “실천 법칙”을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지능적 ‘실천 이성’은 인간을 데이터 처리의 대상으로 환원할 뿐, 자유의 주체로서 입증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의 ‘실천 이성’은 인간을 값비싼 행복을 누릴 능력 있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세상을 양분할 가능성을 보이는 가운데, 모든 인간은, 모든 평범하고 범속한 자들 또한, 자유의 주체로서 그리고 자유롭게 수립된 행위 법칙을 실행할 덕을 함양해 나아갈 의지를 지닌 주체로서 동등하게 행복을 누릴 자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정신 자동기계”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보편적 실천 원리의 수립과 그의 원천이 되는 자유의 보증,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행복할 자격을 가지는 것이 실제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실천이성비판’은 21세기에도, 아니 21세기에 들어 더욱더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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