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사랑하는 철학함으로서의 플라톤 『국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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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사랑하는 철학함으로서의 플라톤 『국가』 읽기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1.09.06 0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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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 1강〉_ 이종환 서울시립대 교수의 「플라톤 〈국가〉」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1. 서양사상 제 1강 이종환 교수(서울시립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함으로서의 플라톤 『국가』 읽기

 

이종환 교수는 플라톤이 “『국가』라는 책을 쓸 때 자신의 철학”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논쟁의 한 복판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라고 질문하면서 “『국가』의 내용이 플라톤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철인 통치, 시인 추방, 네 가지의 덕과 관련한 여러 철학적인 주장들을 현대를 사는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달리 말하여 “고전에서의 맥락을 제거한 정보만을 찾아내어 빨리 습득하려” 하지 말고 “고전의 저자를 역사 속으로 다시 되돌려” 보낼 것을 제안한다. 그를 위해 “『국가』를 읽는 방법 중 하나”로서 “저자인 플라톤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고려하면서 첫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보는” 법인 ‘이야기로 『국가』 읽기’를 소개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야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국가』를 읽는 목적”이 되는 것을 넘어 “『국가』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가 이룰 수 있는 정의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우리에게 정의일 수 있는지 고민”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7월 17일, 이종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국가』와 플라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한 다양한 주장은 많은 논쟁거리들을 제시했지요. 플라톤이 『국가』에서 소개한 여러 주장은 서양 사상사의 흐름에서뿐 아니라 현재 동양의 우리나라에까지도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논쟁거리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종종 잊곤 하는 사실 하나를 짚어봐야 합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을 쓸 때 자신의 철학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논쟁의 한 복판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분법적으로 세계를 나누어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는 것이 플라톤의 의도였을까요? 예술이 가지는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국가』를 집필할 목적이었을까요?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바탕으로 계급을 나누고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국가』를 썼을까요?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국가』는 논문이 아니라 특정한 날에 어떤 주인공이 특정한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해주는 이야기 혹은 극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이고, 플라톤은 그 대화에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독자인 우리는 작가인 플라톤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하기 힘듭니다.

많은 경우 독자들은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가 독자에게 플라톤의 생각을 전달한다고 전제하고 『국가』를 읽습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적 대변인으로 소크라테스를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국가』를 읽는 것은 여러 가능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국가』의 내용이 플라톤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철인 통치, 시인 추방, 네 가지의 덕과 관련한 여러 철학적인 주장들을 현대를 사는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고전의 저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의 독자에게 직접 말해주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다른 맥락에서 쓰인 고전을 우리 맥락에 문자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해석이며, 사실 위험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특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문학적 소양 또한 정보를 많이 가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고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아니라, 고전에서의 맥락을 제거한 정보만을 찾아내어 빨리 습득하려 합니다. 이렇게 고전에 접근하는 것은 고전의 저자가 전달하려고 했던 의미나 가치를 놓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전의 내용을 잘못 이용할 위험까지도 있습니다.

2. 『국가』의 맥락으로 돌아가기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고전의 저자를 역사 속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국가』의 저자인 플라톤은 극 혹은 이야기 형식으로 글을 씁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의 표면적인 내용을 곡해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에 더불어 플라톤이 한국 독자들을 전제하고 『국가』를 썼을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가』를 읽는 방법 중 하나를 이 강의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국가』라는 책의 형식은 플라톤이 상정한 독자가 누구였든 그 독자들에게 철학 지식을 직접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철학 지식 전달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논문처럼 자신의 생각을 직접 논증하는 것이겠지요. 대화편이라는 이야기 형식을 사용하면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아테나이 역사의 여러 주인공들 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저자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직접 그리고 쉽게 알려 주려 하지는 않습니다. 2500년 전의 아테나이로 돌아가서 그때 아테나이 역사를 살아가던 시민 중 하나가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생각해볼 때 『국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플라톤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2500년 후의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석해보는 것이 제가 제안하는 『국가』 읽는 방법입니다.

 

3. 『국가』 저자인 플라톤의 시간 및 공간적 배경

『국가』라는 책을 다른 관점에서 읽기 위해 플라톤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일단 플라톤이라는 사람의 삶과 그가 살았던 아테나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이 겪은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국가』 자체의 배경 또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기원전 428/427(혹은 424/423)~348/247년(이후로는 ‘기원전’을 빼겠습니다) 정도에 살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점부터 20대 중반까지 아테나이는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의 국력을 약하게 했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던 정치인들은 스파르타라는 실제 민중들의 삶이 어찌되든 지루한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갔습니다. 자신의 이익만 고려하는 부정의하고 잘못된 정치인들의 판단은 아테나이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만 만들어갔지요. 플라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좌지우지되고 소수 정치 지도자의 개인적 이익에만 봉사하는 시민들과, 나라 전체의 나아갈 바를 고려하지 않는 정치가들에 의한 왜곡된 형태의 민주정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국가』라는 책의 제목인 ‘politeia’를 ‘국가’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politeia’는 폴리스, 즉 헬라스 사람들이 살아가던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체제를 의미합니다. 이 책이 로마로 전해지면서 라틴어 res publica로 번역되는 바람에 『국가』라고 번역되기 시작했지요. 플라톤의 이 책은 폴리스가 어떤 정치 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국가』는 ‘peri dikaiou’, 즉 ‘정의에 관하여’라는 부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윤리학부터 형이상학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책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는 ‘정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을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것이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논의되기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2권에서 나라와 정치 체제의 차원으로 넓어집니다.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 정치 체제가 갖추어야 하는 조건과 구성 방식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국가』가 정치 철학만을 다루는 책은 아닙니다. 『국가』의 대화자들이 가장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정의로운 사람은 누구이고, 그 사람은 과연 ‘좋은 삶을 사는가?’입니다. 공동체와 분리된 고립된 개인은 없기 때문에, 덕이라는 개인적인 측면과 정치 체제를 통한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정의로운 정치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통치자가 가져야 하는 지식의 지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적인 논의가 필수적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를 ‘정의로운 사람의 행복’라는 하나의 실마리로 풀어가는 플라톤은 어쩌면 자신이 살던 시기 아테나이 사람들의 고민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서 철학자에 의한 통치를 통한 이상 국가 구현이라는 제안을 동시대 아테나이 시민에게 아테나이가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서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왜 플라톤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던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4. 『국가』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

플라톤이 썼다고 알려지는 글의 대부분이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했던 내용을 기록한 형식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쓴 책들은 ‘대화편’이라고 불립니다. 각 대화편의 시간적 배경은 최소한 399년 이전이죠.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니 그가 살아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국가』는 어떨까요? 케팔로스 노인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것 같아 보입니다. 이야기는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과 함께 벤디스 여신의 축제를 구경 가는 시점에 이루어집니다. 이 축제는 아마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빨라야 429/8년, 늦으면 411년에 시작되었다고들 학자들은 짐작합니다.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였든 플라톤이 실제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가』가 플라톤의 창작물이었다는 사실을 대화편의 시간적 배경이 역사의 특정 시점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케팔로스 노인이 아직 살아 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 아테나이가 가장 강성하던 시점의 평화로움을 플라톤이 그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국가』의 드라마 배경이 되는 장소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에 내려왔습니다. 아테나이의 외항이던 피레우스는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아테나이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잘 보여주는 곳이 피레우스였죠. 피레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을 떠났던 민주파 사람들이 힘을 규합해서 아테나이로 돌아왔던 곳이고, 민주 혁명이 시작되었던 곳입니다. 피레우스 항구에 있는 케팔로스의 집에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그리고 트라시마코스 등 역사를 살아갔던 인물들의 대화가 『국가』의 내용입니다. 

5. 『국가』의 등장인물

『국가』의 대화가 일어나는 장소는 케팔로스라는 노인의 집입니다. 아테네 시민은 아니나 거주 외국인으로(metoikoi) 아테나이에 세금을 내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아테나이 시민들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시민과 동등한 권리는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피레우스 지역에서 무기, 특히 방패를 만드는 대규모 공장을 운영하던 케팔로스는 굉장한 부자였음에 분명합니다. 헬라스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고 부정의했던 전쟁이 시작되려는 긴장된 순간을 가장 잘 이용하여 돈을 버는 케팔로스의 집에서 ‘정의로운 정치 체제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입니다.

케팔로스의 아들인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는 아테나이의 정치적 격변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폴레마르코스는, 가업을 고려하면 당연하게도 민주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민주파에 대한 숙청 과정에서 폴레마르코스는 자기 집에서 체포되어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로 처형당했습니다. 동생인 뤼시아스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형의 운명과 비슷한 고난을 겪습니다. 

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치열한 대화에서 ‘더 강한 자의 편익’(1권 338c)을 정의로 규정했던 트라시마코스는 소피스트였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민주정과 깊은 공생 관계였지요. 1권의 주 대화자들인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그리고 트라시마코스는 민주정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2권부터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주도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플라톤의 형입니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친밀했던 것은 분명하고 플라톤의 형들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민주정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30인의 참주정 지도자들과 가까왔던 관계이기는 했지만, 참주정에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새로 복귀한 민주정에 의해 참주정과의 긴밀한 인간관계 때문에 사형을 당했지요. 소크라테스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든 민주정이라는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아테나이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그리고 아테나이의 정치적 격동 가운데 희생당했던 사람들이 전쟁 전 평화의 시대에 한가로이 정의란 무엇인지 논하고 있습니다.

6. 『국가』의 첫 독자들의 입장에서

『국가』를 처음 읽은 독자들은 아테나이를 재건하면서 어떤 정치 체제를 택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던 시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오류와 과오에 대한 반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주인공들은 아테나이의 가장 아프고 부정의한 역사 한가운데서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모두 아테나이를 사랑했지만, 나라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고, 그 때문에 처형당하고 추방당하고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배경이 아직 그런 격동의 시간을 겪기 이전, 평화로운 시대의 축제날인 까닭입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국가』의 주인공들이야 피레우스 항이라는 곳이 상업과 군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항구라고만 알면서 여신의 축제를 즐기고 있지만, 이곳은 폴레마르코스 등이 체포되기도 하고, 민주정이 다시 들어서는 혁명의 본거지가 될 곳이기도 합니다. 『국가』의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논하면서 8-9권에서 민주정의 과도한 자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 결국 그 때문에 민주정은 참주정이라는 최악의 정치 체제로 타락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소가, 새로운 아테나이의 민주정이 회복이 시작되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국가』의 소크라테스는 모르지만 『국가』의 독자들과 플라톤은 알고 있습니다. 

『국가』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나라가 어찌될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들이 실제로 아테나이 부정의한 역사 한가운데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부정의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 정의가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국가』의 독자는 비극 주인공이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계속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독자가 적극적으로 『국가』의 철학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정의란 무엇인지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무비판적으로 듣고 외우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을 통해 독자들에 도전하면서, 이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고 ‘과연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독자 스스로가 생각해보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생각지도 못했던 21세기의 한국 독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왜 『국가』를 읽어야 하는지 질문을 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국가』 읽는 방법은 플라톤의 이야기 안에서 그의 의도를 찾는 탐구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의도를 찾아보면서, 동시에 아테나이 못지않게 부정의를 경험했던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경험한 비극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국가』의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국가』를 읽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이상적인 정치 체제가 이룰 수 있는 정의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우리에게 정의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국가』를 읽으면서 수동적으로 듣고 철학 정보를 외우기만 한다면 시대착오적 실수를 범할지도 모릅니다. 『국가』를 읽으면서 자신을 알고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 활동 자체를 해야 합니다. 

7. 이야기로 『국가』를 읽는 것의 문제

『국가』의 소크라테스가 이상 국가로부터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상 국가의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에 관해 논의하면서 어릴 때 듣는 이야기들이 왜곡된 사고방식을 갖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강한 검열을 해야 하며, 이데아가 아닌 경험 가능한 대상을 모방한다는 이유로 시인을 교육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야기라는 일종의 문학 형식을 사용해서 글을 썼으며, 실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한 것도 아니며 시간적인 배경으로 역사의 특정 시점을 적시하기 어렵다는 점은, 『국가』가 역사를 모방한 플라톤의 창작물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플라톤이 모방을 통해 철학을 했다는 해석은 ‘시인추방’이라는 일반적인 『국가』에 대한 이해와 모순되어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에서 간단하게 답을 드리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의 경우 모방의 대상이 경험 세계이므로, (이데아에 대한) 지식 없이 모방을 하는 시인이 교육을 담당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2권에서 제시하는 나라에는 모방하는 시인이 포함됩니다(2권 373b-c). 이상 국가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즉 자신의 일을 하지 않고 교육자의 역할을 맡으려는 것이 문제지요. 시인을 이상 국가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모방하면서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경우에 한해서는 교육계에서 시인을 추방하라는 것이 『국가』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입니다.

두 번째,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모방 자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종종 찾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하던 일, 즉 지혜를 사랑함으로서의 철학이 ‘가장 위대한 시가’라고 생각했는데, 감옥에 갇혀 있으니 혹시나 그동안 이해했던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소포스의 이야기에 맞추어서 시가를 짓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파이돈』의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가장 위대한 시가라고 생각했지요. 철학과 시가가 정말 나쁜 관계에 있을까요?

플라톤은 모방 자체에 대해서 꼭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법률』의 화자인 아테나이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삶을 모방하여 이에 적합한 법률을 만드는 철학자야말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훌륭한 비극을 지은 시인’이라고 말합니다. 『국가』 7권에서 동굴 밖으로 올라가서 좋음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와서 가능한 밖과 비슷하게 되도록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철학과 시 중 어느 쪽이 교육을 담당할 것인지에 관한 오래된 불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모방을 교육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기반으로 쓰였기만 한다면 시를 통한 교육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요. 모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모방의 대상이 무엇이며 모방자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플라톤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 『국가』라는 모방으로 자신의 철학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국가』의 저자 플라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을 ‘시인 추방’, ‘철인 통치’,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주덕’으로 요약 및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왜곡의 가능성은 심해집니다. 『국가』를 간단하게 요약한 입문서를 반복해서 읽는 것보다 『국가』를 플라톤의 첫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 이야기에 우리를 비추어보면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국가』의 주인공들과 그리고 독자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국가』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해보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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