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쓴 20세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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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쓴 20세기의 역사
  • 김이석 동의대·영화학
  • 승인 2021.06.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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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영화의 고고학: 20세기의 기억』 (장 뤽 고다르·유세프 이샤그푸르 지음, 김이석 옮김, 이모션북스, 186쪽, 2021.05)

『영화의 고고학』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Histoire(s) du cinéma>에 대한 책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대화’에는 평론가 유셰프 이샤그푸르와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에 대해 나눈 대화가 18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 실려 있다. 2부 ‘장-뤽 고다르, 현대적 삶의 시네아스트’는 이샤그푸르가 쓴 감독론으로, 서구 예술사의 흐름 속에서 고다르의 영화세계를 고찰하고 있다.

<영화의 역사(들)>은 10년이 넘는 제작기간과 260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이 말해주듯이 고다르의 영화적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고다르가 자신의 60대를 온전히 바친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 독법(讀法)으로는 쉽게 포착하기 힘든 작품이다. 4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도 만만치 않지만, 영화에 삽입된 엄청난 분량의 영화적, 예술적, 철학적, 역사적 인용구들과 고다르 특유의 형식 실험이 관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영화의 고고학』은 고다르가 구축한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충실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영화의 고고학 그리고 세기의 기억Archéologie du cinéma et mémoire du siècle’이다. 여기서 ‘고고학’과 ‘기억’은 고다르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키워드다. 고다르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영화의 역사(들)>은 영화사(映畫史)이자 동시에 이미지와 소리로 쓴 현대사(現代史)다. 연대기적 질서에 따라 사실 혹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일반적인 역사서와 달리 <영화의 역사(들)>은 고다르의 기억 속에서 소환된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뒤엉켜있는 작품이다. 이 파편 혹은 조각들의 본래적 형상이나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언제나 이미지 사이, 예술과 현실의 삶 사이, ‘역사적인 것’과 ‘시적인 것’ 사이에 스스로를 위치시켰던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도 역사의 조각들 혹은 과거의 흔적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보다는 자유로운 연상과 논리적 비약 그리고 창조적 오독 등을 통해 이런 간극들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샤그푸르는 고다르가 선택한 이런 역사 기술의 방법론을 고고학적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고고학은 ‘과거의 흔적이나 사물의 사실적 기원을 추적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고고학이 아니라, 여기저기 산개된 순간이나 기념물로부터 시작해서 거의 우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푸코적 의미에서 고고학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 안에서는 영화와 회화, 영화와 문학, 영화와 역사가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연결되고, 서로 다른 시‧공간에 속한 목소리와 시선들이 공명하고 교차한다.

                          원서

고다르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의 서기(書記)’이자 ‘시대의 은유’다. 모든 영화는 그 시대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으며, 평균적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직 영화만이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거대한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고다르가 말하는 이유다. <영화의 역사(들)>은 영화를 통한 20세기에 대한 기억이자 고찰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고다르가 이 작품을 통해 환기시키는 20세기에 대한 기억은 영화가 저지른 두 번의 실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 번째는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났던 재앙, 특히 집단 수용소를 포착하지 못한 영화의 무능력과 관계”된 것이며, 두 번째는 “할리우드라는 악마와의 협정과 관련”되어 있다. 영화는 학살과 전쟁과 죽음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와의 거래를 통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도피했다. 고다르는 영화가 혹은 영화인들이 지난 세기에 행한 나치즘과 할리우드에 대한 이 ‘이중적 굴복’을 환기시키면서 ‘역사의 서기’로서 ‘영화가 했어야 했던 일’ 혹은 ‘영화가 하지 않았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영화의 역사(들)>은 필름과 비디오로 촬영과 편집을 하고 디지털 베타캠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스스로를 영화 자체와 동일시할 정도로 영화에 대해 천착해왔던 고다르가 TV를 위해 개발된 기술인 비디오로 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상황은 분명 역설적이다. 하지만 비디오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과연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는 고다르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영화의 역사(들)>에서 비디오는 일종의 영화 박물관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고다르는 비디오로 구축된 이 방대한 아카이브에서 자신의 작품을 구성할 재료들을 수집했다. 이후 그는 비디오라는 창작 도구를 십분 활용하여 필름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을 이미지의 재가공 작업을 수행했으며, 이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에 다양성과 다층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영화의 역사(들)><br>
                                                                 <영화의 역사(들)>

고다르에게 있어서 영화는 20세기의 예술이며 동시에 20세기는 영화의 시대다. 따라서 그는 영화를 통해 20세기를 사유했고, 20세기를 통해 영화를 사유했다. 세기말에 완성된 <영화의 역사(들)>은 필름이라는 질료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역사가 종막(終幕)에 이르렀음을, 고다르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영화가 이제 완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영화의 역사(들)>이 또 다른 서막 혹은 또 한 번의 부활에 대한 기획이며, ‘미래와 별을 향한 투사(投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샤그루프와의 대담 마지막 부분에서 고다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새로운 영화, 다른 예술이 있습니다. 50년, 100년 안에 우리는 그것의 역사를 기술할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장에 접어들었으며, 그리고, 어쩌면 역사의 관념 자체도 변할 것입니다.”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말로 끝맺어진 이 대담 이후 어느덧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고다르의 나이도 90대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세기를 기록하고 증언할 새로운 영화의 실체를 확인하고 성찰하는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김이석 동의대·영화학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영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의대 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7년부터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영화문화협동조합 씨네포크 대표이기도 하다. 『영화와 사회』(공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공역),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부산, 영화로 이야기하다』 등의 책을 쓰거나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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