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엔딩’이라 부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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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엔딩’이라 부르지 마라
  • 고영남 논설위원/인제대·법학
  • 승인 2021.03.2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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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 칼럼]

봄이다. 평년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 올 벚꽃을 보던 눈으로 캠퍼스의 학생들을 겹쳐 본다. 어느 지방의 사립대학 교수에게 그 청춘들은 모자람의 대상이 아니라 고마운 인격이다. 그렇지만 대학 당국은 입시미달이라는 큰 상처에 몰린 채 내년 입시에 대비한다는 명목 아래 모집단위 중단이나 감축이라는 선제적 책략들을 모범생의 답안처럼 내놓는다. 신입생·재학생 충원율이나 취업률 등 온갖 정량지표를 동원하여 못난 놈 자르듯 분모의 숫자를 줄이면 미달이 가려진다는 환각에 빠져, 결국 내년부터는 아주 정상적인 대학이 되리라 굳게 다짐까지 할 태세다. 이러한 아우성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 캠퍼스 내에서조차 불가피한 희생양이라는 잔인한 냉소가 앞선다. 아무도 그 곁에 가지도 않으며 함께 서 있지도 않는다. 분모에서 사라지는 학과(부)가 비록 이곳저곳에서 몸서리치며 저항하여도 누가 이길 패를 가지는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생률이 낮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자괴감이 그 흔한 패배주의조차 뛰어넘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위기의 진실을 가리는 거짓을 또 고발한다.

먼저, 학령인구 감소라는 추세는 낮은 출생률이라는 이데올로기처럼 재난도 아니며 인재도 아니다. 우리 사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며 21세기 전후의 사회상이다. 이는 이미 전국적 규모로 오랫동안 전개된 사회현상이기에 지금의 대학 위기를 부른 유일하고 강력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 이번 대량 미달 사태의 원인을 학령인구 감소에서 구하는 총장이 있다면 그는 이미 총장이 아니다. 비겁하거나, 무능한 교육자일 뿐이다. 굳이 대학 구성원들이 사퇴하라고 하거나 학교법인이 사임을 권유하지 않더라도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교수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결코 궁극의 책무를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예정되었던 숫자의 부족을 강 건너 불구경하던 총장과 이사회, 그리고 국가의 책임을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총장이라면 대학구성원들의 지혜와 용기에 터 잡아 국가를 상대로 그 책임을 따짐이 우선이다.

그 국가 책임의 바탕에는 문민정부 이후 세계화 전략이었던 ‘5·31 교육개혁방안’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1997년도부터 일정한 교육여건을 갖춘 대학은 입학정원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대학정원자율화정책’의 도입으로 기존 대학들이 입학정원을 대폭 증원한 데 그 책임의 배경이 있다. 이때 증원된 입학정원만 해도 8만 명이 넘는다. 문제는 폭증한 대학정원을 감축해야 한다는 작금의 구조조정전략을 국가 스스로 정립해야 하는 상황의 정치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이다. ‘대학정원의 책정은 각 대학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대학정원자율화정책에 따라 기존의 대학들이 입학정원을 많이 늘렸기 때문에 오늘날 대학정원문제가 초래’되었다며 그 교육정치적 책임은 국가보다는 대학 자체에 있다는 견해가 팽배하다. 하지만 대학정원의 폭증은 고등교육의 질을 담보할 대학운영의 기준과 교육여건을 상대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요소인데, 이를 ‘자율화’의 명분으로 고등교육의 정책으로 설정한 국가가 교육정치의 1차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매번 개혁적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장밋빛 공약을 제시하였지만 임기 내내 고등교육에서의 개혁은 언제나 신자유주의에 포위된 채 허둥거리며 방황하였다. 아니다, 길을 잃었다고 해야겠다.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니 길을 잃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그럴 때마다 개혁적 정부가 교육관료를 장악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박한 결론을 내는 게 버릇이었다. 하지만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모두의 상식적 담론을 가로막는 완벽한 구조가 존재하는데, ‘대학서열화’와 ‘서울중심주의’가 그것이다. 기회가 제법 균등하고 절차마저 제법 공정하니 이를 나쁘다고 하면 그저 패배자의 넋두리로 치부된다. 즉, ‘대학서열화’는 실력의 순서이므로 그 자체를 뭐라 할 수 없는 여지도 있으나, 이 기울어진 바탕에 ‘서울중심주의’가 겹치면서 모든 사회·정치·경제·문화의 권력이 하나의 공간으로 쏠리게 되었다. 공간 해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 모두를 누르고 절대 권력으로 전화되는 게 더 무서운 것이다. 서울이라는 블랙홀이 들어 마신 완벽한 구조의 대학서열화에서 ‘삶의 서열’을 읽어야 하는 2021년이 답답할 뿐이다. 모든 질서의 오욕을 거친 2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요구되는 민주주의는 공간의 민주주의일 것이다. 주변부에서 어느덧 변두리로 전락한 채 그 공간마저 존재 이유를 스스로 설명해야 하는 이러한 체제는 이미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신분제보다 강력하고, 계급보다 과학적인 ‘공간의 서열’을 어찌 뛰어넘을 것인가? 이는 환원주의가 아니다. 그저 이 사태, 즉 대학 위기의 원인을 말함이다.

그러니 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할 것이라는 냉소는 은유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말이다. 따져야 할 말도 많고, 물어야 할 책임 역시 많기 때문이다. ‘벚꽃 엔딩’은 없다. 그냥 ‘꽃비’가 흩날려 하늘 가득할 뿐이다. 다소 모자라도 좋다. 그것만으로도 이쁘다. 


고영남 논설위원/인제대·법학

인제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로 <대학평의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민주법학> 편집위원이며, 전공은 계약법으로 교육법, 인권법, 주택법, 법여성학 등에도 관심이 많다. 저서로 『여성과 몸』(공저, 2019), 『대학정책, 어떻게 바꿀 것인가』(공저, 2017), 『민법사례연습』(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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