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도 없고 조타수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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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도 없고 조타수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
  •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 승인 2020.12.1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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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준 칼럼]_ 사인사색

코로나19 3차 대유행의 한복판에 무거운 시간이 통과하고 있다. 연일 1천 명 내외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한때 정치사회 이데올로기 기능을 톡톡히 하던 ‘K 방역 이데올로기’도 3차 대유행에는 맥을 못 추고 사라지고 있다. 이 시기 이데올로그의 과제는 당연히 성과에 취한 K 방역에 대한 빠른 반성과 새로운 대책에 관한 홍보이다. 흥미로운 점은 모 장관의 ‘하명’ 언어게임과 유사한 수준의 ‘일정을 바꾸어, 직접 챙기기로’라는 언어게임이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히 절개라 할 만한 한국방송의 전통적 미덕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 K 방역의 성과는 당국의 순발력만이 아니라 집단 생존 위협에 천년 넘게 시달린 우리의 역사문화적 DNA + 위기 애국주의 + 시민의식 + 위기극복 행위에 반(反)하는 행위에 대한 집단적 징벌의식과 배타적 태도 + 공존 시민의식의 복합 산물이다.

방역 3단계 격상과 병상 확충 등의 문제 논의와 3차 대유행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팽창하는 지금 지루한 드라마와 희비극을 연출하는 다이내믹 코리아 극장의 연기자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소란이 몇 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부동산은 전국단위의 경험해 보지 못한 가격상승 체험을 연일 하며 분노 우울증과 반동적 투기심리, 아니 이제는 제2의 본성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일고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삼중고에 내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오천만의 시사용어가 되어버린 그 흔한 말, 국민 피로도라는 말을 빌려 쓰면, 코로나 피로도가 만든 자연적 우울증과 정치사회집단의 진리독점적 태도와 무능력의 조합이 생산하는 정치사회적 스트레스로 시민은 분노와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특수형 우울 증상에 빠질 지경이다.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코로나 마스크 한 장과 정치사회적 바이러스 방어용 마스크를 한 장 떠 써야 또 다른 유행어인 포스트 코로나 시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하다. 왜 나는, 시민들은 정치사회세력이 생산한 스트레스에 항시 노출되어야 하고 그로 인한 불행의식형 우울 증상에 시달려야 하지?

자고로 정치의 목적은 간명하다. 시민의 행복이다. 정치입문의 동기를 밝히는 정치가나 정치기술자 중에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고 답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들어봤을 정치철학서들에서도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폴리스의 목적이 ‘시민의 행복이라는 것, 그것도 특정 계급만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확한 문장으로 또박또박 적고 있다. 폴리스 아테네의 개혁설계도가 플라톤의 <국가>이며 프랑스와 스페인 왕국에 종속되어 지리멸렬한 힘없는 이탈리아 통일 설계도가 <군주론>이듯이. 로크와 홉스의 정치철학 역시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아름다운 나라, 영국’의 설계안인 <정부론>과 <리바이어던>을 쓰지 않았나? 가만히 보면, 이들의 텍스트는 그들이 살던 나라의 격변기에 쓰인 책들이다. 그런데 당대에 아름다운 나라, 살고 싶은 사회에 대한 꿈은 이들만이 꿨겠는가? 어찌 보면 그들의 텍스트는 당대 시민들의 염원을 옮겨 적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당대의 정치가 정치의 목적에 근접하거나 그 방향으로 가는 중이라면 그와 같은 설계도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시민의 행복과 폴리스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 화가이며 조타수이다. 화가이고자 했으나 자동기술법에 의존하는 표현주의자인지, 조타수이고자 했으나 선원이 아닌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배를 모는 자인지 나는 묻고 싶다. 선출직 정치인, 직업정치인, 준정치인, 유사정치인, 좌우의 당파적 지식인, 적대적 빠문화 생산자와 운영자에게, 정치 마케터들 그리고 정치적 좀비들에게. 시민의 행복과 대한민국 폴리스의 정의는 영원히 불러야 할 시민의 희망가이며, 그 희망가 제조자 중의 한 사람인 시민 K는 운명애를 가져야 한단 말이냐.         

이것은 신념화된 정치의식이 결여된 빠문화-정치 DNA 결핍환자의 멜랑콜리인가? 아니면 이상적 사회와 현실의 격차에 대한 이름 없고 용기 없는 한 지식인의 분노와 혐오감정의 배설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멍청하고 나이브한 게다가 세상에 반드시 있을 이유도 없는 철학자라는 한 인간의 소크라테스 흉내 내기식 푸념인가? 중요한 것은 코로나는 지나가지만, 정치는 남는다는 것, 시민 K도 살아 있고, 살아가리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나라(Kalipolis)의 행복한 시민은 저들이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중 2 상태를 벗어나 태양을 보는 영혼의 시선을 가진 자와 지성적 양심의 살아 있는 활동에 있다. 그들에겐 죄가 없다.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철학교수로 베를린 자유대에서 아도르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동서철학회 부회장, 현대유럽철학 편집위원,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대전인문예술포럼 부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사회철학, 사회이론, 문화예술철학, 고전교육 등이다. 저서로는 『부정과 유토피아』,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 『아도르노의 문화철학』,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 『역사철학, 21세기와 대화하다』(공저) 등이 있으며, 그 외 고전교육 및 예술 관련 책도 다수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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