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여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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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여래를 보다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7.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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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7강>_ 박인성 동국대학교 교수의 「<금강경>」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7강 박인성 교수(동국대 불교학부)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박인성 교수는 불교가 “항상 보고 듣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철학”을 하도록 이끌어왔다면서 “경험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인 불교 용어들이 어떤 경험을 지시하는지 우리의 경험을 따라가며 다시 추적할 필요가 있다”라고 전제하고는 한국 불자들이 『반야심경』과 함께 “자주 독송하는 경전”인 『금강경(금강반야바라밀경)』을 소개한다. 그것은 “대승불교 초기의 논서들인 용수의 『중론』, 『보살지 진실의품』, 미륵과 세친의 『변중변론』 에 의탁해서 해석하기를 시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를 위해 “용어들이 유래하는 몇 가지 구체적인 경험의 예들”을 들어가며 다섯 개의 주요 문구와 두 가지 게송을 아울러 설명한다. 이를 통하여 『금강경』 독자들이 “불교 용어들에 매여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데 빠지는 대신 “자신의 경험을 관찰해가며 함께 사색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 지난 6월 20일, 박인성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6월 20일, 박인성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글을 시작하며

한국 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금강반야바라밀경)』은 『반야심경』과 함께 불자들이 자주 독송하는 경전이다. 『금강경』은 가장 짧은 『반야심경』보다는 길지만 『팔천송반야경(소품반야경)』이나 『이만오천송반야경(대품반야경)』 같은 다른 반야경류의 경전에 비하면 매우 짧은 경전이다. 이렇게 짧지만 대승불교의 이른바 공(空) 사상의 요체를 담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운 경전이기도 하다. 『금강경』은 반야경류 중에서도 초기에 속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초기 불교의 사상이 대승불교의 사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 유통되는 『금강경』은 구마라집 역 『금강경』이다. 구마라집(Kumālajīva: 350-409년경) 역 『금강경』은 읽기엔 편하게 번역되어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과 대조해볼 때 축약하거나 생략한 부분들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구마라집 역을 더 온전하게 읽기 위해서 산스크리트 원문을 직역한 현장 역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불교는 항상 보고 듣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철학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경험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인 불교 용어들이 어떤 경험을 지시하는지 우리의 경험을 따라가며 다시 추적할 필요가 있다.

2. 반야와 반야바라밀다

우리가 보통 『금강경』이란 부르는 경전의 온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구마라집 역)이다. 이 이름에 ‘반야바라밀’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반야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은 반야와 동일한 말이 아니다.

1) 반야

반야는 범어 ‘prajñā ’의 음역어이다. 의역어는 ‘혜(慧)’이다. 그러므로 반야와 혜는 음역과 의역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의미가 완전히 동일한 용어들이다.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혜를 두 자로 늘여 쓴 것일 뿐이다.

『아비달마구사론』, 『유식삼십송석』, 『성유식론』에서는 반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혜란 법에 대해서 간택하는 것이다.”
(慧謂於法能有簡擇.) 『아비달마구사론』

“혜란 반야이다. 그것도 또한 관찰할 대상에 대해서 간택하는 것이다. …”
(dh?h prajn? / s? ‘pyupapar?k?ya eva vastuni pravicayo …) 『유식삼십송석』

“무엇을 혜라 하는가? 관찰할 대상에 대해서 간택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의심을 끊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
(云何爲慧? 於所觀境簡擇爲性, 斷疑爲業.) 『성유식론』

세 논서 모두 반야를 ‘간택(簡擇; pravicaya)’으로 정의하고 있다. 간택의 ‘간(簡)’은 가릴 간, ‘택(擇)’은 가릴 택이니까 간택은 ‘가려봄’으로 번역될 수 있다. ‘봄’이란 말을 넣은 것은 혜의 기능이 대상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택을 ‘가려봄’으로 번역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주 듣는 그 분별(分別; vikalpa)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간택이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고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데 반해, 분별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일체법; 一切法]이 유루(有漏)의 법과 무루(無漏)의 법으로 나뉠 수 있듯, 반야도 번뇌가 있는 유루의 반야와 번뇌가 없는 무루의 반야로 나뉠 수 있다. 유루의 반야의 한 예가 문혜, 사혜, 수혜 3혜이고, 무루의 반야의 예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유루의 3혜 중 문혜(聞慧)는 문소성혜(聞所成慧)를 줄인 말로, 들어서 형성되는 지혜이다. 가령 이 『금강경』의 말씀을 들을 때 형성되는 지혜이다. 사혜(思慧)는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줄인 말로, 가령 『금강경』을 듣고 난 후 스스로 생각할 때 형성되는 지혜이다. 수혜(修慧)는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줄인 말로, 닦아서 형성되는 지혜이다. 여기서 닦음(修, 修習; bhāvanā)이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가리킨다.

지(止)로 의역되는 사마타(samatha)는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관(觀)으로 의역되는 위빠사나(vipassanā)는 ‘나누어서 봄’을 의미한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고 이를 유지하려면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마디(samādhi) 수행을 해야 한다. 사마타 수행, 혹은 사마디 수행을 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면 마음의 흐름을 명석하게 관찰할 수 있고 어떤 주제에 대해 판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힘을 늘려갈 수 있다.

2) 반야바라밀다

반야바라밀다는 대승불교에서 보시바라밀다, 지계바라밀다, 인욕바라밀다, 정진바라밀다, 선정바라밀다와 함께 6바라밀다를 이룬다. 바라밀다는 ‘pāramitā ’의 음역어로, ‘저쪽 언덕으로(pāram) 건너감(itā)’이란 뜻이다. 그래서 ‘도피안(到彼岸)’으로 한역된다. ‘pāramitā ’는 또한 ‘최상의 최고의’를 뜻하는 형용사 ‘parama’의 명사형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완전하게 성취함’이란 뜻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제명대로 반야바라밀다를 이루어야, 즉 반야를 완전하게 성취해야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경전이다. 이 경전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는 한편 남에게 이 경전의 내용을 설명해주면 복덕(福德)이 무한하다고 하니, 반야바라밀다를 위해 보시바라밀다를 같이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금강경』은 이렇듯 반야를 완전하게 성취하기 위해 보시라는 사회적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는 『금강경』에서는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이란 뜻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란 표현으로 나타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로 음역되기도 하는 이 말의 원어는 ‘anuttara-samyak-sambodhi’이다. 정등각, ‘sambodhi’의 ‘bodhi’는 ‘보리(菩提)’로 음역되고 ‘각(覺)’으로 의역된다. 세존과 수보리의 문답은, “무상정등각심을 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수보리의 물음에, “일체의 중생들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그들을 모두 멸도하게 하더라도 멸도를 얻은 중생들이 실제로는 없다”는 세존의 답으로 시작된다. 『금강경』의 주제는 이렇게 무상정등각을 얻는 데에 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과 무상정등각은 동의어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상정등각이 『금강경』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있나를 보면 반야바라밀다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무상정등각은 ‘일체의 상이 없고’, ‘실(實; satya)도 없고 허(; mṛṣā)도 없으며’, ‘평등(平等)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아래에서 살펴볼 주요 문구들은 이러한 무상정등각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을 설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 무상정등각의 이러한 성격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나 알아보자.

3. 『금강경』의 주요 문구

살펴볼 『금강경』의 주요 문구들은 『금강경』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열거돼 있지만, 또한 ‘없다’에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에서 ‘아니다’, 혹은 ‘없다’로 전개되어 있기도 하다.

1)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2)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3)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4)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5) 如來說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이 문구들을 해명하기 전에 『금강경』을 논할 때면 꼭 문제가 되는 ‘상(想)’이란 용어를 먼저 검토해보겠다. 이 상(想)이란 용어는 초기 불교의 5온 곧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瘟), 식온(識蘊)에서도 만나볼 수 있고, 『구사론』의 대지법(大地法), 『성유식론』의, 마음이 일어날 때는 항상 같이 일어나는 5변행심소(遍行心所), 즉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구사론』과 『성유식론』의 정의를 따르면, 상(想)이란 상(像)을 파악하는 작용이다. 상(像)을 파악하는 작용을 본성으로 하기에 파악된 상(像)을 다양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상(想)이란 가령 이 붉은색을 볼 때 감각되는 붉은색이 ‘무엇의 붉은색’으로 통각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상(想)은 이 무엇을 각 경우마다 언어로 표현하는 기능을 한다.

1)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만약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이 문장은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 나온다.

나는 이들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그들을 멸도하리라. 이와 같이 무량하고 무수하고 무변한 중생들을 멸도하더라도 실제로는 멸도를 얻는 중생이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무량한 중생들을 멸도하겠다고 하면서도, 또 무량한 중생들을 멸도했다고 하면서도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고 한다. 이 ‘없다’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생이 실제로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닐 것이다. 중생이 실제로 없다면 말 그대로 제도할 중생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중생이 없다’고 말한 것은 ‘중생이 있다’는 증익집(增益執)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중생이 있다는 증익집을 차단하기 위해 중생이 없다고 말한 것인데, 만약 ‘중생이 실제로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중생이 없다’는 손감집(損減執)에 떨어지게 된다. 이어서 “아상 등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중생이 없다’는 ‘중생의 상(想)이 없다’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만약 상(相)들과 비상(非相)을 본다면 여래를 본다.

보살에게 아상이 없다고 할 때 이 아상은 집착된 아상이다. 보살에게는 집착된 아상이 없다. 그러나 아상이 현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상이 현현하지 않는다면 나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거니와 이를 말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집착된 아상이 있지 않으면서 아상이 현현할 수 있을까? 집착을 끊어 여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네 생각이 어떠하냐? 신상(身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신상으로 세존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하신 신상은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상은 모두 허망하다. 만약 상들과 비상(非相)을 본다면 여래를 본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 [5. 如理實見分]

신상(身相)은 여래에게 나타나는 32가지 신체적 특징들이다. 여래를 이 특징들로 규정한다면 여래를 다른 중생들과 구별할 수 있게 되지만, 이러한 구별은 보살 등 다른 중생들을 전제하고 이를 배제하는 것이기에, 평등성(平等性)이 성립할 수 없다. 여래는 규정된 여래가 되기에 모든 규정을 넘어선 진실(眞實)의 여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를 보려면, 여래가 이러한 상들로 규정되지 않음을, 다시 말해 ‘비상(非相; alakṣaṇa), 즉 ‘상이 아님’ 혹은 ‘상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여러 신상들은 시설(施設; prajñapti)로 나타나고, 여래는 이러한 신상들로 규정된 대로 존재하면서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

3)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비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

앞의 단락에서 상(相)과 비상(非相)으로 보아야 여래를 본다고 했다. 여기서는 이 상과 비상을 법(法)으로 확대하여 법상(法想)을 취해서도 안 되고 비법상(非法想)을 취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 왜냐하면, 이 중생들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상(法相)도 없고 또한 비법상(非法相)도 없다. 왜 그런가? 이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한다면, 아, 인, 중생, 수자를 집착하게 된다. 만약 법상을 취한다면, 아, 인, 중생, 수자를 집착하게 된다. 왜 그런가? 만약 비법상을 취한다면, 아, 인, 중생, 수자를 집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비법(非法)을 취해서도 안 된다. 이런 뜻으로 여래는 항상 그대 비구들을 위해 설한다. 내가 설하는 법은 마치 뗏목과 같다는 것을 알아라. 법을 버리거늘 하물며 비법이랴?

(… 何以故? 是諸衆生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何況非法?) [6. 正信希有分]

‘법상(dharmasaṃjñā)’은 법의 상(想), ‘비법상(adharmasaṃjñā)’은 비법의 상(想)이므로, 각각 법의 있음에 대한 상, 법의 없음에 대한 상을 의미한다. 법상이 있다고 할 때도 아상 등에 대한 집착이 있고, 법상이 없다고 할 때도 아상 등에 대한 집착이 있다.

“이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한다면, 아, 인, 중생, 수자를 집착하게 된다. 만약 법상을 취한다면, 아, 인, 중생, 수자를 집착하게 된다. 왜 그런가? 만약 비법상을 취한다면, 아, 인, 중생, 수자를 집착하게 된다.”에서 보듯,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비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不應取法, 不應取非法)”의 취(取)는 집(執)이다. 그러므로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비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법의 있음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이 없음을 취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법의 있음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법의 없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4)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 되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 된다.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혜능(慧能: 638-713)이 감명 받았다는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가 들어 있는 이 문구는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온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들은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한다.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 되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 된다.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내야 한다.

(…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10. 莊嚴淨土分]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낸다’는 것,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정등각의 마음, 청정한 마음은 ‘일체의 상(想)을 여읜 마음’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일체의 상을 여의면서 어떻게 그 마음, 즉 색을 보는 마음, 향을 맡는 마음 등등을 낼 수 있다는 것일까? 가령 색에 머물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낸다는 것은 색에 머물지 않으면서 색을 보는 마음을 낸다는 말일 터인데, 이는 어떤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일까? 눈앞에 보이는 이것을 보면서 ‘장미꽃이다’ 하는 판단을 내리려면 이 장미꽃에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미꽃이 다른 꽃, 다른 장미꽃과 구별되어 인식되려면 이 장미꽃은 이 장미꽃으로 상속(相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구의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상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장미꽃을 보며 ‘장미꽃이다’ 하는 판단을 내릴 때 이 장미꽃에 탐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머물지 않다(不住)’는 앞에서 본 ‘집착하지 않다(不執)’, ‘취하지 않다(不取)’와 동의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일상적 관심을 가지고 장미꽃을 볼 때 지난 나쁜 추억과 연결된다면 진(瞋)이 일어나면서 ‘장미꽃이다’ 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고, 좋은 추억과 연결된다면 탐(貪)이 일어나면서 ‘장미꽃이다’ 하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이러한 판단들이 색 등에 머무는 마음이다.

그렇다고 ‘색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야 한다’는 문장이 장미꽃에 대한 탐(貪)과 진(瞋)을 끊으면 곧바로 장미꽃에 대한 직관을 얻게 된다는 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이것은 장미꽃이다’ 하는 술어적 판단 이전에 마주치는 선술어적(prepredicative) 판단이나 표상을 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색에도 머물지 않고 색이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아야 진실인 승의(勝義; param?rtha)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5) 如來說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여래가 설한 심들은 모두 심이 아니기에 이를 심이라 한다.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

“여래가 설하는 심들은 모두 심이 아니기에 이를 심이라 한다”는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 나오는 문장으로,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정형구에 맞추어 이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심은 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이다.”

심의 자성(自性; svabhāva)을 타파하기 위해서 “심은 심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심 이외의 그 무엇을 지칭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는 바로 앞의 분(分)에서 나온 문장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있다.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은, 가령 색에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내야 하고, 색이 아닌 것에 머물지 않고 색에 대한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색에 대해서 이렇게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을 정형구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로 바꾸어보면, “색은 색이 아니다. 그러므로 색이다.”가 된다. 역으로 보면, “색은 색이 아니다. 그러므로 색이다.”는 “색은 색인 것도 아니고 색이 아닌 것도 아니다”가 된다. ‘색에 머물기에’ “색이 아니다”라 하며 색에 머무는 것을 막는 것이요, ‘색이 아닌 것’에 머물기에 “색이 아니다”라 하며 색이 아닌 것에 머무는 것을 막는 것이다. ‘아니다’가 이른바 비정립적 부정으로 사용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문구의 뒷부분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심)를 지금까지 논한 앞부분과 관련지어 검토해보면 이렇다. 앞부분 “심들[諸心]은 모두 심이 아니기에 이를 심이라 한다”에서 심들이 뒷부분의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라면, 이 앞부분은 “과거심은 과거심이 아니기에 이를 과거심이라 한다”, “현재심은 현재심이 아니기에 이를 현재심이라 한다”, “미래심은 미래심이 아니기에 이를 미래심이라 한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 할 때 ‘심불가득’은 가령 “과거심은 과거심이 아니기에 이를 과거심이다” 할 때의 이 비심(非心)일 것이다. 이로부터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심”은 심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나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문구는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이 집착된 심들을 끊고 진실(眞實)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4. 『금강경』의 두 게송

구마라집 역 『금강경』에는 게송이 두 개 나오는데, 하나는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 다른 하나는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들어 있다. 이 단락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법신비상분의 게송은 진실(眞實; tattva)을, 응화비진분의 게송은 허망분별(虛妄分別; abhūtaparikalpa)을 나타낸다.

1) 진실(眞實)

여래는 진실(眞實)이고 진여(眞如)이며, 법성(法性)이고 법신(法身)이다. 우리는 어떻게 여래의 법신을 보는가? 『금강경』은 여래의 법신을 보도록 이제까지 우리를 인도해왔다. “보살에게는 아상 등이 없다”, “상들과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본다”,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님을 취해서도 안 된다” 등은 모두 우리를 진실로 인도해 왔다. 이제 이 단락에서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내용을 다시 거론하고 게송으로 이를 집약한다.

수보리여! 네 생각이 어떠하냐?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일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어야 합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게송을 읊으셨다.

색으로 나를 보고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할지니.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 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觀如來者, 轉輪聖王則是如來.”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觀如來”. 爾時, 世尊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여래의 32상을 통해 여래를 본다면, ‘이것은 여래의 색이다’, ‘이것은 여래의 음성이다’ 하며 색으로 여래를 보고 음성으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 모든 세간적 규정들과 함께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세간적 규정들을 떠나 있는 여래를 색, 음성 등의 세간적 규정들을 부여하며 파악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송의 “색으로 나를 보고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나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안식, 이식과 같은 식(識)으로는 나인 여래를 발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식이란 단어 자체에 잘 나타나 있듯이, 가령 안식이 색경에 작용할 때, 즉 안식에 색경이 나타날 때 보는 작용인 견분(見分)과 보이는 대상인 상분(相分)으로 이분되었기 때문이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6식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현행하여 견분과 상분으로 이분된다. 다시 말해, 작용인 견분과 대상인 상분은 초월론적 의식(transcendental consciousness)인 아뢰야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36) 이러한 안식 등 6식은 대상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일면적으로 구성하는 작업 곧 상(想; saṃjnā)을 벗어날 수 없다.

2) 허망분별(虛妄分別)

허망분별은 일상어로 사용하는 허망이란 말이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꼭 버려야 할 것으로 종종 곡해되는 용어이다. 허망분별은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 일체의 유위법들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무량한 아승지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할지라도, 선남자나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에서 네 구절로 된 게송이라도 뽑아내어 간직하고, 수지하고 독송하며 남들에게 설명해준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낫다. 남에게 어떻게 설명하는가?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하여 부동해야 한다.

“일체의 유위법은 마치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마치 이슬과 같고 마치 번개와 같으니 이와 같이 관해야 하느니라.”

(須菩提! 若有人以滿無量阿僧祇世界七寶持用布施, 若有善男子善女人發菩薩心者, 持於此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如如不動. 何以故?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여여하여 부동해야 한다”의 ‘여여(如如)’는 진여(眞如)와 같이 ‘tathātā ’를 한역한 말로, ‘tattva’ 곧 진실(眞實)과 동의어이다. 진여(眞如) 곧 ‘tathātā ’는 ‘그러함’이란 뜻이고, 진실(眞實) 곧 ‘tattva’는 ‘그것임’이란 뜻이다. 모두 ‘bhūta ’ 곧 실(實)과 연결되는 말들이다. 진실과 진여가 각각 원래 이렇게 ‘그것임’, ‘그러함’을 뜻한다는 것을 알면, 보일 때 보이지 않는 ‘그것임’ 혹은 ‘그러함’이나, 들릴 때 들리지 않는 ‘그것임’ 혹은 ‘그러함’이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임’ 혹은 ‘그러함’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그 자체이지만,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5. 글을 맺으며

『금강경』의 말씀을 정확히 읽기 위해 이 글에서는 상(想)과 집(執), 상(想)과 취(取), 상(想)과 주(住)를 구별해서 이해했는데, 집(執)과 취(取)와 주(住)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집(執)은 명(名), 상(想)과 함께 일어난다. 예를 들어 세간에서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고 말하는 경우, 장미꽃이라는 명(名), 장미꽃이란 상(想), 장미꽃이란 집(執)이 동시에 일어난다. 장미꽃이란 집(執)의 경험이 명(名)과 상(想)과 함께 보존되어 있기에 이 집(執)에 기초하여 언설(言說)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이 과정을 소급하여 순차적으로 관찰해서 이 탐, 진, 치의 3독에 배어든 집(執)을 끊고 출세간의 승의(勝義; paramārtha)로 인도하고, 그러면서 세간의 세속(saṃvrti)을 다시 맞이하게 한다. 다시 맞이하는 장미꽃을 보며 상(想)을 낼 때 이 상(想)은 ‘장미꽃’이라는 새로운 말 곧 시설(施設; prajñapti)에 기초를 마련해준다.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이다.”와 같은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로 정형화될 수 있는 문구들은 구마라집 역 『금강경』에 모두 27번 나온다. 가히 『금강경』을 대표할 수 있는 문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진실에 들어가는 다른 표현들의 문구와 비교하며 풀어내야지 이 문구만 따로 떼어내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을 대변하는 주요 문구들을 분석한 결과 이 정형구 역시 ‘아니다’가 비정립적 부정으로 쓰여, 아무런 매개 없이 승의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방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에서 ‘그러므로 A이다’의 A, 가령 ‘반야바라밀다’는 열반에 이르게 하는 뗏목 곧 가설(假設; prajnapti)임이 드러난다.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내는 보살은 아상 등이 없다고 할 때 ‘없다’와, 상들과 상이 아닌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본다고 할 때 ‘아니다’는 비정립적 부정이다. 또 법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때 ‘아니다’도 비정립적 부정이다. 그런데 부정을 하여 다른 ‘경험적인(empirical)’ 무언가를 긍정하는 정립적 부정과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이 부정도 무언가를 긍정한다. 경험적인 무언가에 앞서 존재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transcendental)’ 이념들과 그 관계들을 순수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상(想)을 부정하여 ‘남는 것(餘; avaśiṣṭa)’이란 바로 이러한 초월론적 영역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이 초월론적 영역은 용수의 『중론』에 의거하면 연기(緣起; pratīyasamutpāda)의 영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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