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정치의 비극과 복원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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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정치의 비극과 복원의 희망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4.04.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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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

정책이 실종된 선거가 어디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 선거만큼은 정말 역대급이 아닌가 싶다. 국내외적으로 디지털 전환과 탈탄소화, 일자리, 고령화, 전쟁과 평화, 이주 등 굵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닌데 한국은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선거는 분명 선거 이전 국면까지 정치에 대한 평가와 대안을 쟁론하는 중대한 시기인데, 거대 양당의 정책 아이템이 없다 보니 정책에 대한 평가와 대안은 제대로 공론화될 조짐조차 없다. 대통령의 ‘탈정치’와 소위 ‘여사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은 당연히 중요한 점검 대상이나 특검이 무산된 이후 현재는 기껏해야 거대 정당의 말싸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인 게 사실이다. 외부자 수혈로 얼떨결에 집권해 정책보다는 ‘검찰 존엄’만 보여준 여당이 총선전략 없이 야당에 대한 말꼬리 잡기에 매달리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차기 정권을 잡겠다는 거대 야당으로부터 듣는 말이라고는 ‘검찰 독재 종식’ 외에는 낡은 ‘기본 시리즈’밖에 없다. 위기탈출 기본지원금이 보편적 노인 기초연금의 전 세대로의 확대 수준을 못 벗어나면 진보정책은커녕 계급정치에 가장 민감한 자산 중심의 중산층으로부터 지지를 얻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계급정치의 비극은 하위계급이 자신을 배반한 중도 및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가 차갑게 식고, 오히려 엘리트 계층에 대한 기대가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포퓰리즘의 창궐이 그 비근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거대 정당이 정치적으로 유해한 팬덤정치(지역과 극성 지지층)에 갇혀 있을 때 이를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정치적으로 노동·시민사회운동이었다. 과거 1970년대의 재야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의 시기까지 노동·시민사회운동은 정당정치에 아주 중요한 교정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이제 이는 과거형이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들 중 일부가 이번 선거의 공천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운동정치의 자기이해를 로비정치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공천과정에서의 작은 소란이 선거과정에서는 크게 주목받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선거 이후의 결과와 무관하게 진보진영 일부의 정치공학적 선택은 한국 노동·시민사회운동에 커다란 균열을 낼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정치공학적 선택이 일부 명망가들의 전략적 선택이든, 공명심의 발로든 간에 정당정치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시민사회운동이 더 이상 자율성을 유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세칭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속된 표현마저 과거형이 되고 나면 시민사회운동과 태극기부대의 지향점은 권력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사실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FTA 도입을 놓고 벌였던 격렬한 갈등이 무색하게 문재인 대통령 시기에는 이미 시민사회운동이 깊숙이 제도권력에 포섭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시민사회운동이 제기한 이슈를 제도개혁에 반영하기보다는 후원자 역할을 통해 시민사회운동 진영을 정치적 고객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과정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의원직은 물론이려니와 각종 위원회에 자리 주고, 원하면 의원실 주최 세미나를 열어주다 보니, 시민사회단체도 서서히 이익단체의 로비 역할을 한 지 오래됐다. 심지어는 법안을 가결해놓고, 규제위원회에서 해제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발생했다. 물론 보수진영도 그랬기에 당연하다고 한다면 운동정치를 앞세우면 안 될 것이다. 양대 노총도 어느덧 그러한 후원자 역할을 한 지 오래됐다. 노동현장은 보수화되는데, 중앙에는 각종 현란한 개혁 구호를 앞세운 구호정치와 주장만 앞세우는 정파의 토론회만 남았다.

시민사회운동이 배 굶주리면서 운동정치만 하라는 가혹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운동정치의 자립화를 위한 투자는 제대로 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30여 년 동안 민주시민교육, 양성평등 교육을 해서 시민운동 인사와 관련 연구자들은 시장, 도시자, 장관 표창장을 부지기수로 탔는데, 도대체 그 교육은 받은 MZ 세대는 왜 이들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지 알 길이 없다. 청년들도 모르는 청년쉼터를 도처에 만들어 놓고 표창장 남발하고 구세대가 짬짬이 하는 동안 청년들은 그 세대를 증오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배고프다’는 식의 청년정책 재생산은 아연할 뿐이다.

로비정치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지역균형 발전을 하자고 했더니 지역의 인사들이 모여 정권 창출의 장돌뱅이들이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다 보니 이제 지방 민주화 인사들은 선거 때마다 줄서명을 받겠다고 난리이다. 그들 중 일부는 이번에 비례정당 투항 서명에서도 보인다.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정치의 동학과 정학은 균형이 있을 수 없다. 정치의 동학이 멈추는 순간 사회는 반드시 퇴보한다.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은 동학이 멈추는 시간은 순간이 아니라 오래전에 시작됐다는 점이다. 마치 산사태가 작은 눈덩이에서 시작하듯. 다행히도 희망의 소식은 그 안에서 새로운 동학도 싹튼다는 것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정치권에서 기생하지 않는 ‘재야 2.0’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과거의 운동이 아름다웠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권력에 때 묻지 않은 운동정치가 소멸하면 사회운동의 합법성과 정당성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다. 더 늦기 전에 사회의 자율성에 기초한 동학의 형태가 새롭게 필요하지 않을까?

베버는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지니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멋진 말이나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베버도 ‘정치’에서는 실패한 사람이었으며,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은 심지어 출마의 변을 보면 세계 최고의 소명의식을 가진 자들이다. 물론 의회에 입성하면 달라지는 건 순간이다. 이들 중심의 제도정치가 미래를 담보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미래정치의 전망을 잉태하는 새로운 운동정치의 복원이 없다면 제도정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민주주의가 생활정치로 이행해야 한다고 떠든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생활정치의 주인은 명망가나 활동가가 아닌 시민이 아니었던가? 집 나간 운동정치가 시민 속에서 부활하기를 희망한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은 바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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