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한계는,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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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한계는,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8.27 0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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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물학적 풍요: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 브루스 배게밀 지음 | 이성민 옮김 | 히포크라테스 | 1,356쪽

 

생물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배게밀이 200여 년에 걸친 동물 성애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집적한 이 책에는 20세기 후반까지 과학적으로 문서화한 450여 종의 동물 동성애 사례 중 190여 종의 포유류 및 조류 사례와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거미 및 가축 동물의 동성애 목록이 사진·삽화와 함께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동물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연구 역사는 동시에 동성애를 보는 인간 관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논의는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과학의 해석 문제로 옮겨간다. 그는 1700년대부터 2~3세기에 걸쳐 동물학과 생물학에서 이루어진 동물 동성애에 관한 연구를 고찰하면서 그들의 논증 방식, 즉 잘못된 전제, 가정, 유추, 일반화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는 객관성의 최전선에 있다고 여겨지는 과학계에서조차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이데올로기를 직시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배게밀의 대응 방식에 있다. 그는 자신의 분석 자료를 동성애의 수용을 주장하는 정치적 문장으로 바꾸지 않고 과학적 기록이 스스로 말하는 방식을 택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맞고 틀림’의 문제로 환치하는 배게밀의 시도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과학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간 동물학과 생물학계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동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기 투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를 포괄한 동물의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감정, 바람을 담아 해석한 것이다. 이성애와 번식 중심주의로 대표되는 인간의 자기 투사는 동성애를 이성애로 추정하기, 동성애 활동에 대한 용어상의 부인, 부적절하거나 일관성 없는 적용, 정보의 누락이나 억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같은 성 동물 사이의 마운팅이나 기타 성적인 활동을 이성애를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활동쯤으로 보거나 잘못된 성 식별이나 병에 의해 발생하는 오류로 치부하는 시선 속에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짙게 서려 있다.

배게밀은 방대한 현장 연구 자료를 통해 이런 시선의 문제를 폭로한다. 배게밀이 보기에 그간의 생물학의 무지는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비번식적인 성 활동 등으로 나타나는 동물의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오직 생식生殖에 기반해서만 설명하려는 외골수적인 시도에서 비롯한다. 기실 이런 시도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배게밀도 인용하고 있는 존 홀데인의 말처럼 “자연계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기이하다면, ‘기이한queer’ 동물의 삶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물 동성애를 둘러싼 논쟁은 흔히 다음과 같은 양극화된 주장으로 귀결되곤 한다. “동물에게는 동성애가 없다. 따라서 인간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동물에게서 동성애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논쟁에서 쟁점은 두 가지로 수렴한다. 첫 번째는 동물 세계에 동성애가 있는가, 두 번째는 동물 세계와 인간 사회를 등치할 수 있는가. 배게밀은 이 두 가지 주장 모두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 도식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동물이 곧 자연이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인간에게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논리. 오직 동물 동성애의 발생 유무만 따지게 된다. 따라서 관찰된 혹은 보고된 현상에 대해 한쪽에서는 정보 누락이나 편향된 해석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수용과 성급한 일반화로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배게밀은 우선 동성애의 의미를 섹스에 한정하지 않고, 구애, 애정, 짝결합, 육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확장한다. 이 활동들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섞이지만, 동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동성애의 다양한 양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그는 동물 동성애를 의사소통, 도구 제작 및 사용, 금기, 의례 등과 관련해 살피면서 동물 고유의 문화 형성을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다. 동물 역시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며, 동물 동성애는 생물학적인 차원과 문화적인 차원이 결합해 수많은 형태와 변형, 독특함을 보여준다. 동물 섹슈얼리티는 연속적이면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것이다.

동물 동성애를 둘러싼 양극화된 논쟁에서 드러나듯 많은 이들은 동물 행동을 기반으로 인간 동성애의 결론(긍·부정)에 도달하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이에 대해 배게밀은 동물과 인간 모두에서 동성애 표현의 전적인 복잡성과 풍부함을 고려하지 않으면, 동성애라는 현상의 본질적 성격과 맥락, 종간 비교의 의미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동성애가 자연스러운가? 동성애가 정상적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의 주관적 잣대로 좌지우지되는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하다. 배게밀의 말처럼 이제는 자연을 해석하는 우리의 눈이 아니라 연구 대상인 자연 자체로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주관적 잣대를 벗어나 자연을 연구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배게밀은 200년 넘게 서구 과학계를 지배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해독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이런 모색이 새로운 이론이나 설명으로 기존 이론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이런 탐색은 우리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이자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에 가깝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기존의 지식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실에 새로운 지식 패턴을 추가하는 일이다.

배게밀은 흥미롭게도 그간 과학계에서 비과학적이라고 터부시한 토착 문화에 주목한다. 북미 원주민, 뉴기니와 멜라네시아 부족, 시베리아와 북극 원주민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동물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은 현대의 과학적 관찰과 매우 흡사하고 그에 부합하는 성격을 띤다. 물론 그들 문화에 서려 있는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믿음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다多성애적·다多성별적 자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포용적인 시각에서 자연을 연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읽어낼 수 있다. 배게밀이 포스트다윈주의 진화론, 카오스 이론, 생물 다양성 연구와 같은 현대 과학과 조르주 바타유의 일반 경제 이론을 융합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토착 문화와 현대 사상의 교차점에서 보면 비선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자연 현상, 파괴적이거나 비생산적인 사건, 일관성이 없거나 직관에 반하는 무수한 변형, 마치 낭비처럼 보이는 과다한 삶의 양태 등은 진화나 물리 법칙, 역사의 진보와 같은 더 큰 힘의 결과나 부산물이 아니다. 그 자체가 부조화한 전체를 이루는 구성 요소며, 자연계의 과도한 낭비와 풍요는 다른 모든 현상들이 흐르는 생명의 원천이자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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