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넘어 공생체로 - 동북아 평화공생체 구축을 위한 이론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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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넘어 공생체로 - 동북아 평화공생체 구축을 위한 이론적 탐구
  • 조성환 원광대학교·한국철학
  • 승인 2023.06.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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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지난 6월 10일 군산대학교에서 범한철학회와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공동 주최로 “공동체를 넘어 공생체로: 미래 공생을 위한 철학의 연대”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범한철학회(회장 김성환)는 1986년에 창립되어 동서양을 아우르는 전국 규모의 철학 학회이다.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소장 김정현)는 2017년에 시작된 원광대학교 HK+사업단으로, ‘동북아 공동번영을 위한 동북아시아다이멘션(NEDA) 토대 구축’을 아젠다로 연구를 수행 중이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올해 연구 주제인 <동북아시아 평화공생체 구축>과 연계해서 기획되었다.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에서는 필자를 포함하여 세 명의 발표자가 참여하였다. 발표의 취지는 종래의 공동체 개념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공생체’ 개념을 제시하면서, 거기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세 명의 발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범한철학회 김성환 회장의 개회사<br>
                                                     범한철학회 김성환 회장의 개회사

▶ 먼저 한국종교를 연구하는 허남진은 「공동체에서 공생체로: 동북아시아 공동체 담론의 철학적 배경」을 주제로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동북아시아에서 전개된 공동체 담론에는 “하나로 엮으려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다양한 존재들의 연결과 접속을 통해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공생의 네트워크로서의 ‘공생체’ 개념을 제안하고자 한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community의 번역어로서의 ‘공동체’라는 말은 1880년에 일본에서 나온 『行政法』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개념이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면서부터이다. 손열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동아시아공동체’ 논의의 기원은 1938년에 일본에서 시작된 ‘동아협동체’이다. 

한편 오늘날 일본의 대표적인 사전인 『広辞苑』에는 ‘community’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고, 공통에 속하는 감정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 지역사회. 공동체.” 즉 공통의 속성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공동체의 다른 말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공동체’ 개념은 개별성이나 차이성보다는 “동질성과 협동성이 강조되는 집단”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 중국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인류운명공동체(人类命运共同体 The Community of Common Destiny for Mankind)’ 담론을 제창하였다. 이 담론은 시진핑 주석이 최고 지도자로 올라선 2012년에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언급되고, 2018년에 헌법 서문에 정식으로 삽입되었다. 그 사상적 자원은 중국철학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천하위공(天下爲公), 또는 대동(大同)이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 등을 바탕으로, 오늘날 인류가 처한 공통의 위기를 극복하고 지구 차원의 공동체를 실현하자는 비전을 담은, 일종의 중국식 ‘지구공동체’ 논의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공동체(community)와 달리 공생체는 어떠한 공통성도 전제하지 않는다. 생물학에서는 공생체를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유기체 종 간의 연합(association)”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연합(聯合)’이라는 한자어 번역은 ‘공동체(共同體)’ 개념과 마찬가지로 ‘동일성’이 강조되는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연립(聯立)’ 개념을 제안한다. ‘연립’은 “함께 어울려 선다”는 뜻이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연립적으로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존재는 연립이다.” 마찬가지로 공생체는 유기적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숲의 초목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내는 ‘균근류(菌根類) 네트워크’처럼, 다른 이질적 존재들을 연립할 수 있게 하는 네트워크가 공생체이다. 공생체라는 생물학적 사실은 동북아시아 공생의 철학을 창발시키는 데 중요한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다.

즉 ‘공동체’가 공통의(common) 것을 전제로 하는 집단을 의미한다면, 공생체는 반대로 이질적인 것들의 연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 보면, 이러한 공생의 원리에 따라 네트워크로 엮어지고 있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공생의 철학을 구축할 수 있는 상상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발표자 허남진 - 논평자 이원진<br>
                                             발표자 허남진(왼쪽) - 논평자 이원진(오른쪽)

▶ 허남진의 발표에 이어서 한국철학을 연구하는 조성환은 ‘공생체’ 개념의 분석과 실천 사례에 초점을 맞추어 발표를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린 마굴리스의 ‘공생’ 개념을 축으로 해서, 한국의 공생 운동의 사례로 「한살림선언」과 장일순 철학을 분석하였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생체’라는 말은 생물학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다. 이것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이다. 마굴리스는 1998년에 Symbiotic Planet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symbiotic은 ‘공생하는’으로 번역된다(우리말 번역서는 “공생자 행성”이다). ‘공생’ 개념은 1873년에 독일의 생물학자 안톤 데바리가 처음 제안하였는데, 그 의미는 “종류가 아주 다른 유기체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생의 상태에서 살고 있는 유기체를 ‘공생체(symbiont)’라고 한다.

그런데 공생은 단순히 “이질적인 것들과 함께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함께 생성한다”는 뜻도 들어있다. 그것을 생물학에서는 ‘공생발생(symbiogenesis)’이라고 한다. 공생발생은 러시아의 발명가 메레츠코프스키가 제안한 개념으로, “공생적 합체(symbiotic merger)라는 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기관과 유기체가 형성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상이 마굴리스가 『공생자 행성』에서 말하는 공생의 의미이다. 마굴리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공생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함께 산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끼리 합생(合生)하고 신생(新生)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가 마굴리스의 공생(symbiosis) 개념을 ‘함께 만들기’를 의미하는 ‘공-산’(sympoiesis) 개념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마굴리스에 의하면, 소(牛)라는 개체 안에도 미생물 공동체가 거주한다. 즉 개체 안에도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생체의 ‘체’를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체 안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말로 공생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집합체이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공생하는 행성”이라는 책 제목을 한자어로 바꾸면 ‘지구공생체’가 될 것이다. 즉 지구는 “공생체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이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공생체들은 서로 의존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마굴리스는 “남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몸 안팎에 있는 수백만의 종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조상이자 일부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마굴리스의 ‘공생하는 행성’ 개념은 토마스 베리가 『지구의 꿈』에서 제창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 개념과도 상통함을 알 수 있다. ‘통합적 지구학’의 선구자인 베리는 community의 어원을 common(공통)이 아닌 communion(친교)으로 보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 친교를 맺고 살던 친밀한 지구공동체의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나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 이외의 “친척을 만들자”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김정현 소장<br>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김정현 소장

▶ 마지막으로 종교철학을 연구하는 박일준은 두 사람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공생체 개념에 접근하였다. 즉 생성이 아닌 분해의 관점에서 공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였다. 특히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현대철학, 가령 후지하라 다쓰시의 『분해의 철학』, 브뤼노 라투르의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Reassemblimg the Social)』, 그리고 프랑시스 마르탱의 『숲 아래서: 나무와 버섯의 조용한 동맹이 시작되는 곳』 등을 참고하면서, 사물의 분해와 부패가 지니는 생성과의 측면에 주목하였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란 말은 “여러 이종적 존재들이 함께(sym) 삶을 만들어(poiesis) 가는 ‘심포이에시스’의 과정(sympoietic process)”을 뜻한다. 그래서 라투르는 “사회란 고정되고 명확한 실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탱에 의하면, 나무와 곰팡이균류는 이와 같이 함께 만들어 가는 심포이에시스를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실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심포이에시스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분해’이다. 분해의 원어인 ‘decomposition’은 de와 composition의 합성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de는 부정접두사이고 composition은 구성이나 조립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decompostion에는 구성과 분해라는 뜻이 동시에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생을 논할 때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분해’의 측면을 간과하고 ‘구성’의 측면만 강조하는 것이다.
 
구성과 분해의 동시적 작용은 균류(菌類), 즉 곰팡이와 버섯 무리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센의 식물학자 프랑크는 버섯과 나무뿌리가 양분을 교환하면서 공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무뿌리와 버섯을 합친 신조어로 ‘균근’(菌根)을 제안하였다. 이 균근류 연결망을 통해 식물은 다른 나무들과 소통을 한다고 한다. 프랑시스 마르탱에 의하면, 프랑스의 어느 숲에서는 “수령이 3백 년이나 되는 참나무들이 250여 종의 균류와 평화로이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균류는 소통보다 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것은 바로 부패와 분해이다. 즉 분해 작용을 통해 사물을 부패시켜서 에너지를 재활용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탱은 분해가 “생명을 내뿜는 창구”이고 “죽음은 삶을 낳는다”(마르탱)고 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후지하라 다쓰시도 ‘분해’라는 말은 ‘먹는다’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생물학에서 ‘분해자(decomposer)’란 “남아있는 양분을 분해하여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양분으로 변화시키는 생물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패기능이 약화되면 먹이 사슬의 기반도 약화된다.”(『분해의 철학』)

이처럼 분해와 구성은 존재를 구성하는 두 얼굴이다. 연결시키는 힘과 부패시키는 힘의 기묘한 조화 속에 우리가 살아갈 세계를 위한 지혜가 담겨 있다. 이렇게 보면 생명중심주의(biocentrism)라는 말은 하나의 환각일 수 있다. 그리고 이 환각이야말로 우리의 문명을 생산과 소비의 문화로 몰아가는 이데올로기로 작동될 수 있다. 

생성이나 생산에 대해서 분해와 부패에 주목한 점은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동아시아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장자』는 생사(生死)를 기(氣)의 취산(모임과 흩어짐)이라고 보았는데, 여기서 생(生)이 composition에 해당한다면, 사(死)는 de(분해)의 측면을 말한다. 그리고 기의 취산을 보다 넓은 개념으로 표현하면 ‘기화(氣化)’가 된다. 기화는 기후변화, 기분변화, 기운강화 등과 같이 모든 종류의 상태 변화를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일준의 발표는 동아시아적 개념으로 바꿔 말하면, “기화의 관점에서 본 공생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시적 세계의 ‘균근류 네트워크’를 인간 사회에 적용한다면 일종의 시민연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국가나 이념과 같은 거대한 장벽을 넘어서 ‘공생’이라는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촘촘한 네트워크 구축이다. 실제로 필자가 원광대에서 경험한 사례를 소개하면, ‘동학농민혁명’을 매개로 한 한일시민교류나(한국측 대표 박맹수), ‘안중근’ 연구를 매개로 한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와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와의 교류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민세력은 비록 크지 않지만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꾸준히 지속된다는 장점이 있다. 


이상으로 학술대회의 세 개의 발표를 필자 나름대로 요약해 보았다. 마굴리스의 과학 이론이 ‘공생의 존재론’에 해당한다면, 「한살림선언」은 ‘공생의 실천론’에 해당할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이 중에서 주로 전자를 탐구하는 논의의 장이었다. 다행히 학술대회에 참석하신 선생님들이 “주제가 참신하다”는 격려를 보내주셨다. 아울러 이론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조언도 해주셨다. 이렇게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도 학술대회를 준비한 한사람으로서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성환 원광대학교·한국철학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서강대와 와세다대, 원광대에서 수학과 철학, 종교와 역사를 공부했고, 동학사상사와 인류세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 근대의 탄생》에서는 동학의 탄생과 전개를 ‘자생적 근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했고,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에서는 퇴계와 다산, 동학을 ‘하늘철학’의 전개 과정으로 서술했다. 《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공저)에서는 토마스 베리와 해월 최시형을 ‘지구인문학’의 시선에서 비교했고, 《개벽의 사상사》(공저)에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님의 문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번역서로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인류세의 철학》(공역) 등이 있고, 최근 저작으로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 철학의 전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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