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제국의 성쇠와 한반도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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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의 성쇠와 한반도의 대응”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6.12 0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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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 2023 국제학연구소 소천한국학센터 및 푸단대학 한국연구중심 제2차 공동학술회의 「중화제국의 성쇠와 한반도의 대응」 개최

 

한반도의 명운은 중화제국의 그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삼국시대 – 당나라 이후 양쪽의 왕조 교체 시기를 살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화제국의 왕조 교체는 언제나 무력을 수반했으며, 거의 항상 한반도에 유탄을 날렸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신라에서 고려로, 몽골제국이 붕괴한 후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멸망은 단 1년의 시차를 두었다. 몽골제국과 청나라가 등장할 때 고려와 조선은 전쟁을 겪어야 했다. 평화의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고려ㆍ조선의 대외정책에서 중국과의 평화 유지는 최우선 과제였다. 중국 역시 가장 가까운 이웃, 고려ㆍ조선과의 관계를 대외관계의 모델로 삼았다.

역사에서 한중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조공관계 또는 속방이라는 용어 하나로 한중관계가 정리되곤 했고, 이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가감없이 전달됐다. 과연 이러한 인식은 올바른 것인가? 역사 속의 한중관계가 일정한 틀을 갖추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다양한 변화와 역동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서울대학교 국제학연구소 산하 소천한국학센터와 푸단대학 한국연구중심의 한중관계 세미나의 일환으로 공동학술회의 「중화제국의 성쇠와 한반도의 대응」이 지난 9일 14시부터 서울대 국제대학원 GL룸에서 개최됐다. 서울대학교 국제학연구소(소장 신성호)와 한국역사연구회(회장 박태균)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번 학술회의는 한국역사연구회의 중세국제관계사반이 중심이 되어 조직됐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중화제국의 팽창과 수축, 흥성과 쇠락이 한반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가운데 한반도는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살펴봤다. 14세기 후반 몽골제국이 붕괴하는 때부터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쳐 19세기 말 중화질서가 무너지는 시점까지,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순간 한반도 왕조는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때의 선택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이러한 분석은 20세기 말부터 미국에서 나타난 중국위협론과 21세기 본격화되고 있는 미중 간의 경쟁 상황 속에서 지역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지성계가 가지는 역사 오용의 문제와 함께 어떠한 행동을 통해 현상을 변경시킬 것이냐가 아닌 어떤 세력에 편승하는 데에 논의가 집중되는 현재의 상황을 비판적 검토를 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노영구 국방대 군사전략학과 교수가 각각 ‘전근대 한중관계의 해석이 갖는 현재적 의미’와 ‘중국 위협론의 역사적 실체와 한반도의 대응’을 주제로 기조발표를 했다. 

이어 본 세션의 발표는 △정동훈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몽골제국의 붕괴와 한반도의 군사화, 그리고 왕조 교체) △이규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15~16세기의 조선은 부국강병을 꿈꾸었는가?) △구도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16세기 조선의 ‘예의지국’ 위상과 ‘중화’) △김창수 전남대 사학과 교수(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군신의 청 정세 인식) △손성욱 창원대 사학과 교수(청제국의 ‘주변’ 상실과 조선의 부상)가 맡았다.

발표에 이어 진행된 종합토론에는 허태구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와 이지영 아메리칸대 한국학 교수,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참여했다.


【학술대회 발표 요지】


○ 노영구 교수, 〈중국 위협론의 역사적 실체와 한반도의 대응〉

노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명은 몽골과 고려, 여진의 연결을 끊기 위해 요동 서부의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요동 및 두만강 유역의 여진을 적극 위무해 조선화 정책을 추진했다. 세종 대에는 여러 차례의 여진 정벌로 영토를 확장했을 뿐 아니라 만주 남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보했다. 이는 명목상 이 지역을 지배했던 명과의 충돌을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외 전략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노 교수에 따르면 1449년 명 정통제가 몽골의 일파인 오이라트의 포로가 되고, 수도 북경은 1년 동안 포위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이 만주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기에 명은 방어에 힘을 집중할 수 있었고, 몽골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후 조선은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을 잃고 왜란과 호란을 겪었다. 15세기 말부터 정벌보다 국경 방어만 강화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명 이외의 세력을 무시하고 명과의 관계만을 의식한 탓이다. 노 교수는 “강대국과 중견국들이 함께 만들어온 것이 동아시아 역사의 보편적 모습”이라며 “오늘날에도 ‘어느 세력과 손잡느냐’ 대신 ‘어떻게 현상을 변경시킬 것인가’에 논의가 집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동훈, 〈몽골제국의 붕괴와 한반도의 군사화, 그리고 왕조 교체〉

정동훈 교수는 고려 말 급속한 군사화에 초점을 맞췄다. 즉, 정교수에 의하면 고려 말은 ‘군사화’라는 열쇠말로 설명할 수 있다. ‘팍스 몽골리카’(몽골제국이 가져온 유라시아의 안정)로 인한 오랜 평화가 공민왕(재위 1351∼1374년) 즉위 전까지 고려를 비무장 상태로 만들었다. 몽골제국에 의한 평화가 갑작스레 무너지면서, 고려는 대륙과 해양 모든 방면에서 외침을 겪었다. 자연히 인력과 물력을 전쟁 대비에 총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붕괴가 가시화되자 공민왕은 빠르게 군비를 강화했다. 안보와 직결된 요동의 동녕부(東寧府)를 1370년, 1371년 공격해 점령하고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몽골 잔당이 일으킨 난을 평정했다. 군비가 강화되면서 정치와 사회 전반에 불안감이 고조되었고, 무력을 장악한 군사 집단이 패권을 차지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는 결국 몽골제국의 붕괴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 이규철 교수, 〈15~16세기의 조선은 부국강병을 꿈꾸었는가?〉

이 교수는 “조선은 국익을 위협할 경우 사대의 대상이었던 명일지라도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은 15세기 동안 외부세력에 대한 정벌을 통해 대내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조선은 대외정벌을 통해 많은 외교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를 이해할 때 유교 성리학의 시각에서 부국강병에 해당하는 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15세기의 조선은 부국강병책이 가지는 문제점을 주의하면서도 강한 국가에 대한 지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 분위기는 16세기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이상적 국가상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


○ 구도영 연구위원, 〈16세기 조선의 ‘예의지국’ 위상과 ‘중화’〉

국초 조선의 위정자들은 고려 시기 몽골이라는 강력한 제국을 경험하면서 중국 왕조와의 관계를 특히 중시했다. 조선 조정은 규정된 시기에 맞추어 사행파견을 준수하여, 조공국으로서의 의전을 한결같이 지켰다. 더욱이 명과 동일한 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데에 따른 공감대와 격식을 갖춘 表文, 조선사행의 유학적 품위 등이 명 식자들 사이에서 공유됐다. 명 관료들은 그러한 조선을‘禮義之國’이라 인정하면서, 다른 조공국보다 예우를 더했다. ‘禮義之國’ 위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자 16세기 조선 지식인은 대명외교에 이 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한편으로는 예의지국 백성이라 자임하면서 내면화하게 된다.

한편 구 연구위원은 조선 후기‘中華’ 계승의식과 조선 전기 ‘예의지국’ 위상과의 상관성을 시론적 측면에서 고민해 보고자 했다.


○ 김창수 교수, 〈19세기 전후, 조선 군신의 청 정세 인식〉

19세 전후 청 제국의 성세(盛世)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고 지방에서 반란이 점차 빈번하게 발생했다. 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 왕조는 이와 같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신(使臣)의 보고는 높은 공신력을 지녔는데, 조선 군신은 이를 통해 청 황제의 통치, 나아가 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에는 양국의 안정적 관계가 영향을 주었다.


○ 손성욱 교수, 〈청제국의 ‘주변’ 상실과 조선의 부상〉

청은 조선을 전쟁으로 얻었다. 조선은 명의 가장‘공순한’나라에서 청의 첫 조공국이 되었다. 청을 ‘중화제국’이라 호명한다면, 그 형성과정에서 조선은 더없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렇다면 19세기 거센 서세동점으로‘중화제국’이 주변을 상실하며 쇠퇴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했을까. 그동안 많은 연구가 축적됐지만 미·중 갈등이 가속화되는 현실을 곱씹으며, 19세기 중후반 서양에 대항해 청과 조선이 함께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공유하며, 변통된 관계에서‘가치동맹’을 강화해 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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