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리가 펼치는 탈(脫)의 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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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가타리가 펼치는 탈(脫)의 위상학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4.30 2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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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서론: 리좀」 읽기 | 조광제 지음 | 세창미디어 | 220쪽

 

이 책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중 「서론: 리좀」 부분을 따로 추출하여 그들의 ‘리좀’ 개념을 심층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리좀(rhizome)은 ‘땅속줄기’를 뜻하는 말이다. 잔디의 뿌리를 보면 기다란 줄기에 여러 잔디가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태’, 곧 ‘고원(plateau)’이 연결되어 하나의 리좀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고원, 그 안의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 ‘나’는 어떤 회사의 직원일 수도 있고, 동호회의 리더일 수도 있고, 어떤 나라의 국민일 수도 있고, 한 마리 동물일 수도 있다. 리좀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상하의 위계질서도, 우열도 없이 모든 고원이 한데 어우러져 연결접속을 반복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해체하는 동시에, 해체된 세상을 리좀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공고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던 근대사회와 달리, 현대사회는 모든 위계와 권위가 해체되어 파편화되었다. 이렇게 파편화된 고원은 상하좌우가 없이 상황과 목적에 따라 연결되기도, 분리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A와 B의 결합은 A+B가 되는 것도 아니고, AB라는 통일점을 향하는 것도 아니다. C라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접속’되는 것이다. 리좀은 잔디 뿌리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채 연결되어 유연하고 유동적인 형태로 우리 주변을 재구조화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의 원리를 6가지로 나누어 살핀다. ① 연결접속의 원리, ② 이질성의 원리, ③ 다양태의 원리, ④ 탈의미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⑤ 지도 만들기의 원리, ⑥ 전사(傳寫)의 원리, 이렇게 6가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리좀의 원리 6가지마저도 단계별로 이루어지거나 각 원리가 분절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저자 조광제 교수는 잔디 뿌리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리좀의 원리가 어떻게 서로 간섭하고, 서로의 다양태이자 바탕이 될 수 있는지 다양한 예시를 통해 친절하게 해설한다.

『천 개의 고원』의 첫대목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실바노 부소티의 악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의 악보는 연주 가능한 악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난해하고 혼란스럽다. 어떤 곡은 연주를 위해 작곡을 했다기보다 그냥 악보 위에 그림을 하나 그린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악보 전체를 가로지르는 무분별하고 거친 선을 두고 저자는 이를 ‘탈주선’으로 명명한다. 이 선들은 정해진 오선지를 벗어나 옆으로, 아래위로 자유분방하게 그어져 있다. 그리하여 ‘탈지층화’가 일어난다. 여기에 어떤 특정한 악기가 주도하는 영토도 구별할 수 없으므로, ‘탈영토화’가 일어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서 ‘기관들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이 말은 앙토냉 아르토라는 극작가가 사용한 말로서, 마치 유정란 속의 생명체처럼 신체 기관이 형성되지 않았지만, 신체로 인정받는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끊임없이 현재의 틀을 깨는 탈영토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로 ‘기관들 없는 몸’을 언급한다. 유기체적 기관은 우리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손’은 청중 앞에서 ‘효과적인 제스처를 위한 손’이 되고, 옮겨야 하는 물건 앞에서 ‘일하기 위한 손’이 되고, 연인 앞에서 ‘손을 맞잡기 위한 손’이 되고, 언어 장애인 앞에서 ‘말하기 위한 손’이 된다. 곧 신체는 한 가지 기능에 연결되는 것을 벗어나, 때와 장소, 목적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기체적 기관 개념을 거부하여 ‘기관들 없는 몸’을 주장한다. 이처럼 ‘탈주선’, ‘탈지층화’, ‘탈영토화’, ‘기관들 없는 몸’이라는 개념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이 연결접속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데, 모든 수직적이고 수형적인 관계를 평면화시켰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탈의 위상학’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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