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치병: 중국 혐오증과 미국 숭배증 - 소국의식, 지정학적 운명론, 타율이성의 삼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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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치병: 중국 혐오증과 미국 숭배증 - 소국의식, 지정학적 운명론, 타율이성의 삼중주
  •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3.04.0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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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빈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

 

한국의 불치병: 중국 혐오증과 미국 숭배증

- 소국의식, 지정학적 운명론, 타율이성의 삼중주 - 

 

사진: 국민일보

사상적 기원: 논리-정서구조의 생성

사상은 정치를 통해서 구현된다. 한국의 “혐중-숭미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으로 내면화한 사상에서 발원하여 점차 “논리-정서구조”를 형성하여 현실에 발현된 것이다.

이른바, 한자와 유교 수용으로 인한 중화를 향한 ‘문화적 동화주의’가 출발점이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 이후 형성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의 “소국의식”과 “지정학적 운명론”이다. 한국의 소국의식은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내포하는 평화 지향적 의미가 아니며, 또한 국가주의적 팽창을 반대하는 “소국주의”(이시바시 단잔)가 아니다. 그냥 중국과 비교해서 문명과 영토상 왜소한 국가라는 자아정체성 인식이다. 이것과 연동된 “지정학적 운명론”은 지대박물의 거대한 중국 문명을 항상 쳐다보아야 하는 주변국이 자신은 항상 주변의 소국에 불과하여 ‘분수에 맞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자기검열(self-censorship)의 숙명론적 논리-정서구조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소국이 대국을 치는 전쟁은 불가함”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이후 조선의 소국의식과 소중화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논리-정서구조가 되었다.

특히 서세동점의 시대 한국은 중-일에 끼인 반도에 불과하다는 지정학적 운명론은 더욱 심화하여 지금까지도 한국의 정치문화와 대외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논리-정서구조는 한국인의 세계관과 사물(事와 物)에 관한 판단 준거를 자신이 아니라 항상 외부의 거대한 후원자에게서 찾으려 하는 “타율이성”(heteronomy reason)이 숙성하고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의 함의는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고 진위(眞僞)와 선악(善惡), 미추(美醜)를 판별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이성을 갖춘 주체적 존재인데, 한국인은 주체적인 “자율이성”(autonomy reason)이 아니라, 외부의 거대한 힘에 의존하는 “타율이성”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동아시아 고전시대 한국은 중국 문명을 존숭하고, 정치적으로는 사대하면서, 주변부 이민족들보다는 우수한 문명국이라고 자부하며 지냈다. 이렇게 형성된 논리-정서구조는 서세동점과 미세동점을 대면하면서 동화의 대상을 미국으로 바꾸어 지속되고 있다. 자연히 중국은 점차 숭배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격하하고 말았다. 더구나 21세기 미국은 중국을 ‘세계의 주적’으로 규정하여 국제사회에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특히 동아시아에 패권적 지위를 영속하기 위해 한국인의 타율이성을 간파하고 활용하려는 속셈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른바, 혐중-숭미 논리-정서구조는 상기 세 가지 사상적 바이러스에서 발원한 합병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 흐름에 따라 혐오-숭배의 대상만이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근대에 등장한 김구(백범)의 “문화대국론”, 안중근과 여운형의 “동양평화론”이 김대중의 “문화산업의 세계화와 개방정책”으로 연동되어 현실적인 탄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영토적 소국의식을 극복하고 “문화적 대국의식”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선도하는 사상적 근거를 정초하게 되었다. 이른바, 한국에서 발원한 “문화대국-동양평화론”은 한류의 급부상과 함께 21세기 동아시아의 진보적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사상적 씨앗이다. 한국은 “타율이성”을 극복하고 “자율이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사진 출처: 미래한국(좌), 한국일보(우)

역사적 경험과 사조의 연동

혐중-숭미의 논리-정서구조는 역사적 경험과 상응하여 더욱 구체화한다. 1637년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그간 야만으로 여겼던 만주족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였다. 그러나 마음만은 멸망한 명의 마지막 황제(숭정제)를 흠모하며 ‘재조지은’에 감사드리고 제사도 지낸다. 게다가 사라진 명조의 대중화를 잇는 소중화제국으로 행세하며 자기만의 정신승리를 과시하였다. 이른바 ‘대청사대(對淸事大)-대명의리(對明義理)’라는 새로운 논리-정서체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소중화제국의 군주 고종은 갑신정변을 맞아 황급히 청조가 파견한 원세개에게 ‘나를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소중화의 자존심은 남한산성에 이어서 조선 말기에 쓰다 버린 짚신이 되고 말았다.

1883년 조선은 최초로 서양(미국)에 외교사절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당시 이들은 백악관에서 아서(Chester Arthur) 대통령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는 것으로 한미외교의 출발을 알렸다. 그런데 큰절의 대가로 받은 세뱃돈은 헐값에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이었다. 이 황당한 외교 에피소드는 오늘날까지 한미관계(주인 앞에 엎드린 하인)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근래에도 ‘날리면’ 대통령에게 ‘노룩 악수’를 ‘윤’허 받은 대가로 반도체 산업을 통째로 조공으로 바치라는 어명을 받들어야 하는 ‘기묘한 혈맹’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남북한-중-미의 애증의 파동은 해방과 한국전 이래 그 숭배와 혐오의 방향을 고정하여 오늘날까지 영속하고 있다. 만청혐오 인식은 현재 중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 한반도를 팔아넘기고 전후에는 점령군으로 한국에 입성, ‘제주 4-3 진압작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결국 한국전까지 참전한 미국은 중국과 이심전심으로 남북분단을 주도하고, 이후 한국의 타율이성을 한껏 이용해 고전시대 중화를 대체하는 근현대 신중화이자 숭배대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물론 해방 이래 북한 변수는 이러한 혐중-숭미의 논리-정서구조를 조금 더 복잡하게 하는 변수이다. 그러나 남북한 각자의 혐오-숭배의 논리-정서구조도 사상적 기원은 위와 같다. 단지 그 대상만 서로 바꾸어 작용하고 있다.

상기 역사 서사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징을 추론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상기한 대로 심층에 내면화한 사상에서 구체화한 논리-정서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첫째, 한국은 자국의 후원자 대국의 희망을 대리하여 혐오와 숭배를 표출하고 있다. 그 강자의 희망열차에 편승하기 위해서 누구를 적대하고 존숭하는 길을 걷고 있다. 따라서 명조와 미국을 숭배하는 의식은 만청과 중국을 혐오하는 의식과 호응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자신을 위해 창출한 의식이 아니라 타율에 이끌려 조성한 것이다. 

둘째, 한국은 세계패권의 선진 대국을 숭배하고 문화적 동화를 추구함으로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논리-정서구조를 특성화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후진이라서 임진왜란을 당한 게 아니라 지나치게 경시해서 당한 것이다. 즉, 조선의 선진 중화문화 수용과 그것의 충실한 전달자라는 소중화의 자부심이 일본을 향해서는 천시의식으로 투사되어 나온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한국 일각에서 숨을 쉬는 친일 사조는 미국숭배증이 일부 곁가지로 전염한 것이다. 일본이 서구를 가장 신속하게 모방하여 한국에 가르쳐 주었다고 믿는 이른바 ‘일제 식민지근대화 사조’이다. 여기서 그 논리의 허위의식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난다.

셋째, 지난 한중미 서사를 돌아보면, 한국의 열렬한 혐중-숭미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그와 관계없이 그저 이해득실의 변화에 따라 서로 경쟁하면서도 거래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 이래 분단체제 구축은 미-중이 합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대중봉쇄정책을 펼치던 중에 70년대에는 관계정상화를 통해 중국을 국제사회에 등장시켰다. 이는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중의 계산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WTO 가입도 미국의 평화적 중국변화전략의 논리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중 훈풍의 계절은 21세기 들어 중국몽이 등장하면서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게 된다. 이른바, 미-중관계는 혐중-숭미 불치병에 걸려 신음하는 한국의 처절함과는 관계없이 그들만의 국가전략에 따라 흘러가고 있다.

 

사진출처: 시사IN

허위의식의 그물에 갇힌 좀비들의 자유

상기를 종합하면,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소프트-하드파워가 기만적으로 운영하는 ‘허위의식의 그물’ 속에서 ‘혐중-숭미 불치병’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다. 한국전 이래 무려 몇 세대를 지나면서 이제는 모태신앙이 되고 있다. 사실 미국숭배증의 그림자에는 ‘친일주의 정신병’도 같은 맥락으로 숨어 있다. 다만 숭미주의와는 달리 간사스럽게 표면에 안 나타나고 안팎에 숨어서 한국을 향해 히죽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의 공론장은 미국 문화패권이 지배하고 있다. 아니 식민화하고 있다. 2천여 년간 한국의 공론장을 지배하던 중국문화는 한국전 이래로는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의 동아 패권에 편승하는 숭미반공 보수세력이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언어로 가장 창조적인 사유를 해야 하는 대학에까지 마수를 뻗쳐 영어논문과 영어강의를 돈(성과급)으로 강제하다시피 하고 있다. 21세기 후반부터는 동아시아 시대가 예고되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혐중-숭미의 병증은 온몸으로 전이되어 악화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배경은 간단하다. 한국에서는 중국을 혐오하고 미국을 숭배해야 이익을 보는 세력이 문화-지식의 공론장을 식민화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은 혐오를 조장하는 재료로 사용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은 숭배를 조장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그 결과 우리의 미국 인식은 한 방향으로만 질주하고, 중국 인식은 여러 방향으로 파편화하고 그중에 나쁜 것만 강조되고 있다.

중국 드라마가 한복과 김치, 삼계탕을 훔치려 한다고 민족적 분노가 분출하는 가운데, 미국은 한국의 먹거리인 반도체 산업을 통째로 강탈하려 하는데도 숭배의 축제를 벌이는 게 진정 우리가 독립 국가의 주체적 국민이 맞는가. 

어떤 사람이 ‘자유’를 열창하고 ‘한미동맹 복원’을 외쳤다. 그런데, 당연한 전제를 마치 특별한 것인 양 외치는 것은 구구법 2x2=4와 같은 초등수학으로서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을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사실은 말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내가 유엔에서 지동설을 열창하면 지구가 감격해서 더 열심히 도는가.

특히 한국 보수세력의 ‘자유’에는 미국숭배와 중국(과 러시아)혐오의 정서가 은폐되어 있다. 보수의 자유민주주의와 진보의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보수가 특히 ‘자유’를 붙이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덜 자유스러운 중국(과 북한, 러시아)을 혐오하기 위한 프레임을 제조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무비판적인 서민들이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미국 사회도 자유의 사각지대가 중-러 만큼이나 많다. 그 특성이 다를 뿐이다. 인종차별과 총기사고, 복지제도의 열악함, 이기적인 달러패권, 세계적 수준의 언론패권을 활용하여 자국과 타국(특히 반미국가)의 ‘자유’를 무력화시키는 미국우선주의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게 미국이다. 

게다가, “아는가, 모르는가!”(知否! 知否!). 자유와 민주를 강조하면서도 약소국의 자유와 민주는 자기의 입맛에 맞게 조종하여 착취하고 가끔 학살도 서슴지 않는 솜씨는 미국(과 서유럽,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보다 훨씬 고단수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영-미 제국의 폭력성과 학살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고전시대 유교국가의 ‘대외적 평화주의’ 성향이 강한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에서 훨씬 침략주의가 완화할 것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물론 정치개혁 이후의 중국을 전제한다. 

자유를 강조하면서 중국(과 러시아)혐오를 표방하고 동시에 한미동맹 강화 운운은 모두 혐오-숭배의 논리-정서구조의 연장선에서 일어나고 있다. 극혐-북한도 이런 맥락이다. 미국을 숭배하기 때문에 미국의 타자들은 모두 혐오의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논리-정서구조의 반영이다. 미국과 유럽은 코로나 발생지가 중국이라는 주장을 편다. 또한, 코로나 이후 세계와 국내경제가 안 좋아지는 상황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임에도, 유독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 책임을 돌리려는 프레임 전략도 모두 미국우선주의와 혐중-숭미 논리-정서구조에서 파생한 것이다. 

지금 세계는(특히 미국의 문화적 식민국가에서는) 우크라 전쟁이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일어난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한다. 그러나 전쟁이란 전후 맥락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발발한 돈바스 전쟁에서 1만 4천여 명의 친러시아 주민이 ‘네오나치’ 세력에 의해 집단으로 살해당했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분노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세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후원마저 하고 있다. 이러한 전후 맥락을 생략하여 무조건 러시아는 악마이고 우크라이나와 미국은 천사라고 규정하면 ‘사실에 가려진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사진: 연합뉴스

강자의 약자를 향한 전쟁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전쟁의 배후에 숨어 안 보이는 강자가 조작한 허위의식의 그물을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자유와 인권’을 외치는 것만큼 좀비다운 게 없다. 혐중-숭미에 굴종한 대가로 얻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미국의 이기적인 자국우선주의는 전후 동아침략과 학살을 자행한 일본 극우보수와 손을 잡고 한국을 중-러 견제의 척후병으로 삼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른바, 국제인권과 평화라고 하는 미국의 구호는 사실 할리우드 액션에 불과하고 유럽의 네오나치든 일본 극우보수든 오로지 그들이 미국의 국익에 호응하느냐 여부만이 중요한 것이다. 

촘스키(Noam Chomsky)는 말한다. 중국과 러시아 언론은 후진이라 차라리 투박하여 그 속셈이 투명하게 보이는데, 미국 언론은 영리하고 교활하여 ‘은폐된 진실과 허위’를 간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의 자유와 민주에 관하여는 중국이 미국보다는 후진이지만, 미국과 비교해서 정치발전의 출발 조건과 시점이 다르다. 사실, 중국과 미국 모두에서 특유의 사회적 문제는 존재한다. 중국을 혐오하기 위해 단점만 부각하고, 미국을 숭배해야 하므로 단점을 숨기고 살지는 말자.

우리가 진정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희망한다면, 북한혐오에 빠져 ‘우리가 북한보다 더 부자야’라는 마스터베이션에 몰두하기보다는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의 전략’임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 미워서 이기고 싶으면 ‘평화적 변화전략’이 한반도 발전의 최선의 전략이다. 혐중-숭미 논리-정서구조에 사로잡혀 ‘선제공격론’을 주장하는 것은 승리전략이 아니라, 남북한 모두 치명적인 파괴를 당하는 ‘한반도 자폭전략’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최대의 피해자는 부서질 게 많은 한국이지, 미중러일과 북한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혐중-숭미에도 불구하고 미-중이 이심전심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게 있다. 보통 한국인은 미국의 대북 제재가 북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북한보다 수천 배의 핵을 갖춘 중-러와 비교해서 별것도 아닌 북한이 왜 그토록 가혹한 제재를 받고 있는지 생각하자. 차라리 중-러와 핵무기 제한 협정을 추구하는 게 지구상의 핵위협을 줄일 수 있는 첩경인데도 말이다. 

그렇다. 북한제재는 사실 한반도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구도에 봉사하는 노예로 삼기 위한 남북한 동시 지배전략이다.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적은 물론 중-러이지만, 그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선 미국에 절대적 복종심을 가지고 최전선에서 싸워줄 한국 좀비가 필요하다. 만일 남북한이 친하게 되어 경제협력의 길로 가게 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거의 잃게 된다. 이른바, 동아시아에서 중-러를 견제하면서 미국을 위해 대신 죽어줄 졸병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북한제재는 북핵을 구실로 삼아 한반도의 “자주적 발전과 자율이성”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미리 차단하여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중국도 북한제재로 인해 받는 이익이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편이다. 중국은 북한에게 후원자이면서도 동시에 제재에 동참하여 남북한 교류 확대를 저지하는 방해자이기도 하다. 북한에 대한 이중전략의 동기는 남북한이 통합의 길로 가면 미국과 같은 이유로 남북한을 분리 지배하는 게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히 후원하고 적당히 제재에 참여하면서 한반도가 자력갱생을 못 하도록 막는 측면에서는 미국과 적대적 협력관계를 즐기고 있다. 이른바, 한국의 혐중-숭미에도 불구하고 미-중은 한반도를 끝없는 긴장상태(남북갈등, 남남갈등)에 묵혀두려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혐중-숭미의 떼창을 부르는 한국이야말로 어이 상실한 삐에로가 아닌가. 

최근에 우리는 중국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도전과 미국의 신경질적인 대응전략을 목격하고 있다. 문제는 미세동점의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혐오하고 미국에 편승해야 이익을 보는 세력이 형성되고, 이들이 앞장서서 ‘혐중-숭미 이데올로기’를 그럴듯하게 ‘자유와 민주’ 담론으로 포장하여 확산하는 상황이다. 한국인의 타율이성을 간파하고 원격 지배하는 미국에 의해, 또한 그에 편승하는 한국-일본 보수에 의해 혐중-숭미의 논리-정서구조는 불치병의 지경에 이르고 있다.

 

냉소적인 나의 해방일지: 밖에 못 나가니 안으로 갈 수밖에!

중국의 부상은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과의 충돌선에 있는 한국을 어떻게 하면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최소한 중립지대에 있도록 설득 전략을 진행 중이다.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몸값은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 보수는 혐중-숭미 불치병에 걸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똥값으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는 중국과의 관계는 위축되고 손해는 늘어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타율이성을 이용해 빨대를 꽂고 경제-군사적으로 요구사항만 잔뜩 증대하고 있다. 

최근 ‘경기연구원’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 번영을 보전하는 국가 기본목표와 대응 방향으로 미국 및 일본과 정책공조의 제도화를 추진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위기를 관리하고 북한을 포위, 포용하는 “결미친중협일교아포북(結美親中協日交俄包北)”을 제시했다. 그런데 왜 한국을 무시하고 독도침탈을 지속하면서, 안보와 경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국가전략을 설정하고 있는 일본과 공조만을 강조하는지 의문이다. 최소한 미-일이 한국을 이용해 등쳐 먹는 상황을 경계하는 대응전략도 공조전략과 함께 동시에 제시해야 정상이지 않나. 우방이란 상호 이익을 교환하는 관계이지 한쪽만 서비스하는 것은 주인-노예 관계에 불과하다. 또한, 왜 중국과 러시아를 위기 상황으로 판단하는지 의문스럽다. 오히려 혐중-숭미의 중병에 걸린 한국외교가 위기에 빠진 게 아닌가. 이 보고서는 ‘한국의 불치병에 대한 인과관계의 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표면에 드러난 현상에 대한 교과서적인 진단만 하고 있다. 불치병에 관한 진실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그 진실을 직시하는 게 치료의 첩경이라고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 심리학은 설파하고 있다. 

중국 친구의 반문을 상기한다. “미국이 진정으로 당신네 나라를 지켜줄 것으로 믿는가? 우리 중국은 한국이 친중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단지 중-미와 다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정치는 그릇이 너무 작다. 중-미 이외에 러시아, 중동, 인도 등으로 시야를 넓히고 북한을 이용하여 중국과 일본을 모두 견제할 생각은 못 하고 동네 꼬마 북한과만 싸우지 못해 안달이다. 북한 핵이 그렇게 두려우면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우리 중국의 핵무장에는 왜 잠잠한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중국 핵을 해체하라는 배짱 있는 한국을 보고 싶다. 미국이 착하다고 칭찬할 게 아닌가.”

이른바, 이 친구의 말인즉, 한국의 사고체계는 혐중-숭미 구조에 스스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골목 깡패에 불과한 북한 때리기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발상을 한다면, 같은 핏줄인 북한(미개발 자원이 많다)을 잘 이용하여 인접국인 중러일을 견제하고 국익을 증대할 생각이 없는지 묻고 있다. 손자병법이 제시하는 ‘싸우지 않고 (북한을) 이기는 게 최선의 전략’이다. 물론 이것은 주인 나라 미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미국은 한국군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콜로세움을 지어놓고 남북한 노예 검투사들을 서로 싸우게 하면서 자신은 햄버거와 콜라를 처먹으면서 옆자리에 앉은 중국, 일본과 함께 낄낄거리며 주말을 즐기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미국에게 한국의 기간 산업을 다 조공으로 갖다 바쳐야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웃기지 않는가. 미국인은 북한 관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한국인은 미국의 윤허를 받아야 갈 수 있다는 게 정말로 민족적 자존감이 상하지 않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율곡과 퇴계 선생을 미국의 노비로 갖다 바칠 것인가. 

치료약은 두 가지다. 나의 외부로 나아가 과감히 진보정치를 실천하는 것과 내면으로 들어가 의식의 각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외부로 나가는 것은 북한을 부수려 하지 않고 이용하려는 전략이다. 북한과 러시아를 미-중과 협력하면서도 견제하는 매개로 삼는 것이다. 과감한 행동이 필요한데, 우리 그릇이 작아서 안 된다면, 결국 가부좌 틀고 앉아 가장 소극적으로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성찰과 명상이나 하는 수밖에.

한심스럽게도 한국의 진보 정치꾼들조차 국제정치 영역에서 혐중-숭미 세력의 집요한 허위의식 프레임에 맞설 용기와 전략이 없으니,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향하여 ‘의식 각성’을 촉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사유와 ‘참나’를 찾아 떠도는 인생의 여정에서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결론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게 부처님도 하나님도 다 믿는 나의 ‘냉소적 결론’이다. 

법정 스님은 어느 글(1977년)에서 말한다. “미국이 아니면 이 나라가 하루아침에 곧 쓰러질 것처럼... 미 지상군 철수의 이유가 어디에 있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자주 민족이라면 대외 의존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제힘으로 설 때도 되지 않았는가.”

 

고성빈 논설위원/제주대학교·정치학

런던대학(SOAS)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제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 사상과 역사논쟁에 흥미를 가지고 현재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공저),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비판이론의 탐색』이 있으며, 그 외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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