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오마주도, 문제적 표절도 아닌 현대의 ‘음악적 인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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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오마주도, 문제적 표절도 아닌 현대의 ‘음악적 인용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22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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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상징으로서의 인용음악: 현대음악에 나타난 상호텍스트성 미학 | 오희숙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500쪽

 

처음 듣는 음악인 듯한데 귀에 익은 리듬과 멜로디가 섞여 흘러나와 발걸음 멈춘 적 없는가. 관심 가라앉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유명 음악가의 표절 논란에 예술에서 과연 독창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궁금해해본 적 없는가.

기존의 음악적 재료들을 창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인용음악(Musical Quotation)’이란 한 흐름이 음악사엔 존재한다. 옛것의 활용ㆍ변형을 통해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이 음악적 인용의 기원은 단선율의 그레고리오 성가가 오르가눔(Organum)ㆍ모테트(Motet)ㆍ미사 등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이러한 인용기법이 작곡의 중심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는 주장도 함께한다.

이 책은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인용음악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들의 미학적 성취를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관점에서 분석해낸 결과다. 옛 악곡과 새로운 창작곡 사이에서 형성되는 음악적 관계성의 미학에 대한 학술적 탐사인 셈이다. 출처를 밝히는-주(註)라는-가시적 레이블이 부재하는 음악의 영역에서, 표절 아닌 인용이 나름의 예술적인 창작 방식으로 수용되어간 역사와 이론적 토대 그리고 그 현대적 실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참조점을 제공한다.

음악작품 창작에서 작곡가들이 무엇보다 고심하는 부분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18세기 서양음악사에 가장 중요한 미학적 강령으로 등장하는 ‘독창성 미학’은 여태까지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새로운 어떤 것(Einmaligkeit)을 추구했다. 이는 예술음악의 본질적 특성이자 서양음악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양상은 변화한다. 새로움에 집중하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기존하는 음악재료를 새로운 창작에 활용하는 과감한 시도들이 빈번하게 나타난 것이다. 나아가 이런 분위기는 점차 음악계의 중요한 특징으로까지 부상한다. 옛것과 새것이 겹쳐져 탄생하는 ‘음악적 콜라주.’ 이것은 결국 현대 음악미학의 새로운 관계성(상호텍스트성)에 대한 숙고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이러한 음악적 인용이 단순히 기법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술 본연의 문화 맥락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음악가들이 어떤 작품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빌려온다면, 그는 단순히 선율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문화적 연상(함축)작용까지도 함께 가지고 오는 것”(멧처D. Metzer)이기 때문이다. 인용과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에 더해 문화(적 상징)라는 키워드가 이 책의 중심 주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먼저 ‘인용음악’과 ‘상호텍스트성 미학’에 대한 이론적 논의의 토대를 검토한 뒤, 구체적인 작품 연구를 통해 개별 사례들을 살펴나간다. 구체적인 작품 연구를 통해 저자는 인용음악에서 상호텍스트성의 미학이 복합적인 층위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며, 이는 최종적으로 ‘문화적 상징성’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의의를 다음의 네 가지 차원으로 정리한다.

첫째, 음악적 인용은 무엇보다 문학과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문학이 함축하고 있는 문화적ㆍ인문학적 의미를 드러내 보여준다. 상호텍스트성의 미학을 자유로이 구가했던 작곡가들은 탁월한 문학적 소양의 소유자들이었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서 다채롭게 소환해냈다. 이렇게 인용음악은 다양한 문학가ㆍ철학자들과 사상적으로 조우하고, 예술적으로 대면하고 대화하면서 창출되는 문화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음악적 인용은 역사와 시대의 대변자 역할을 맡는다. 보통 사회상을 반영하는 음악의 특성은 리얼리즘 미학을 통해 활발하게 논의되곤 한다. 그러나 음악적 인용을 통해서도 이러한 측면은 자연스럽게 부각될 수 있다. 인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를 담아내는 저장고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용은 “문화적 기억의 형식으로서 상호텍스트성 미학”의 특징을 또렷이 드러낸다.

셋째, 인용음악은 독창성의 미학에서 해방되는 돌파구를 열어주고, 이를 통해 기나긴 예술음악의 역사를 성찰하며,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역사와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고 말한다. 블룸이 말한 “영향의 불안”에서 벗어나 예술가는 인용을 통해 옛 전통과 대화하면서 역사에 대해 성찰한다. 그리고 그 성찰을 작품 안에 담아낸다. 물론 이러한 담화와 대화의 방식은 상호텍스트성 미학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넷째, 특히 한국 음악에서 인용은 우리네 역사적 특수성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음악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무엇보다 서양의 인용음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 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양식의 일환이거나 작곡가들의 개성적 표출로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인용음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와 그리 큰 관련성을 보이지 않았다.

서양 현대음악에서는 음악의 내재적 흐름과 구별되는 이질적인 단편들이 인용되면서 작품의 유기적 흐름이 단절되는가 하면, 양식적 다원주의가 자주 발견되었다. 하지만 특히 정태봉이나 이인식, 이혜성 등에게서 인용은 양식적 다원주의 대신 한국의 문화와 상징을 강조하고, 그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의식적으로 한국인에게 친숙한 민요나 대중음악을 활용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서양의 예술음악을 다양하게 인용한 경우(신지수와 이신우)도 있지만, 이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양성보다는 순수 미학적ㆍ사회학적 의미 차원에 보다 큰 관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한국의 사회적 맥락(한국 기독교계 또는 피아노 음악계)에 관여되어 있다. 즉, 한국 현대음악에서 음악적 인용은 서양음악을 수용한 한국 작곡가들이 외적 환경과 자신의 고유한 뿌리 사이에서 파생하는 고민을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미학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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