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과연 공정 사회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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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과연 공정 사회는 가능한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22 0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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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 이후의 세계 | 김정희원 지음 | 창비 | 264쪽

 

최근 한국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공정’이다. 특히 취업, 입시 등의 문제에 있어 젊은 세대의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에 대한 열망은 단순히 기대와 바람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지배 담론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은 최우선 가치로 앞세워지고 있고, 동시에 그 의미가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왜 한국 사회는 이렇게까지 ‘공정성’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이 책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여성할당제, ‘이대남’ 논란 등 익숙한 사례를 통해 젊은 세대의 공정 요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공정이 어떻게 능력주의와 만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고 누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공정 담론에 함축된 구조적 맥락과 사상적 배경은 물론 더 나아가 소모적인 공정 논란을 넘어서는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공정성 모델은 구조적, 역사적 불평등을 무화하고, 개인의 노력과 경쟁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원자화 모델이다.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따라서 내가 부당하게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는 (다시 말해 똑같이 보상받거나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공정에 대한 요구는 얼핏 정당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정’은 사회 전반에 걸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 또는 사회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 원리로서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공정하지 않다”는 외침은 많은 경우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 억울함, 박탈감 등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 신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각자도생의 시대, 불안정성에 대한 개별적 반격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에 대한 맹신은 도리어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외면하고 심화한다. 

책의 1부에서는 최근 몇년 동안 한국 사회의 핵심 가치로 여겨진 공정 담론의 거센 파도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고찰한다. 불안정성에 대한 개별적 반격으로서의 공정과 담론적 폐쇄의 메커니즘, 그리고 능력주의 신화가 계급과 정체성의 복합적 교차로 인한 차별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점을 조목조목 짚는다. 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각자도생의 논리만을 신봉하는 개별주의적 존재론이다. 저자는 기존의 공정 담론을 검토하면서 능력주의 논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마이클 샌델의 입장에 대해서도 한계를 지적한다. 능력주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겸허한 자세와 추첨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샌델의 주장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화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온건한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비판 담론의 보수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공정’을 낱낱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공정을 넘어서 정의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비전을 선보인다. 개별주의적 존재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로 정의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정의란 순수이성의 객관적 판단과 독립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철학사의 정의론과는 궤를 달리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는 관계적 존재론에 기반한 것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대안적 가치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다. 저자는 보편적 정의와 돌봄이라는 두 기둥 위에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한 조직 공정성의 원칙과 일상에서의 변혁정의 운동 사례를 통해 실천적 지평을 소개한다. 공정하고도 정의로운 사회는 개별화된 이해관계에 기반한 정치가 아닌 관계성과 공동체성의 정치, 일시적 효능감의 정치보다는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장기적 전망의 정치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 그 자체에는 죄가 없다. 공평하고 올바른 사회를 갈구하는 열망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정 담론은 그저 ‘공정한가’ ‘공정하지 않은가’를 헛돌고 있다. 이 책은 그 쳇바퀴에 브레이크를 걸고, ‘공정’을 납작하게 해석하여 이용하기에 혈안이 된 한국 사회가 놓치고 있던 정의의 개념과 논의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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