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자연은 최고의 발명가인가, 베끼고 훔치고 속이는 모방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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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자연은 최고의 발명가인가, 베끼고 훔치고 속이는 모방꾼인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8.22 0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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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 | 닐 슈빈 지음 | 김명주 옮김 | 부키 | 256쪽

 

세계적인 고생물학자인 저자 닐 슈빈은 이 책에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표절과 도용으로 가득한 진화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저자는 팔다리, 날개와 깃털, 지느러미, 커다란 뇌와 뛰어난 인지 능력 등 생명의 진화를 이끈 혁신과 발명이 사실은 수십억 년 동안 베끼고 훔치고 변형한 결과라고 말한다. 발 달린 물고기와 깃털 달린 공룡 화석, 바이러스 덕분에 생물이 더 똑똑해진 이유, 이기적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점핑 유전자, 크리스퍼-카스(유전자 가위) 기술의 탄생 배경 등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 40억 년의 진화사와 200년의 진화 연구사, 그리고 최근 20년 동안 눈부시게 발전한 게놈 생물학의 최신 성과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만의 대표적인 형질은 바로 큰 뇌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뇌가 어떻게 이렇게 커질 수 있었을까? 캘리포니아의 한 연구 팀이 인간과 히말라야원숭이의 뇌 조직을 비교한 결과 인간에게만 있는 ‘NOTCH2NL’ 유전자를 발견했는데 이 유전자는 뇌 조직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유전자는 ‘NOTCH’ 유전자의 사본임이 밝혀졌다. 즉, ‘NOTCH’ 유전자가 끊임없이 복사되고 중복되는 과정에서 변이가 일어나 하나둘 새로운 기능을 얻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NOTCH2NL’ 유전자인 것이다. 결국 인간의 뇌가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유전자가 새로 만들어지기보다 원본 ‘NOTCH’ 유전자를 베끼고 베끼고 또 베낀 덕분이다.(203쪽)

사실 동물의 몸과 유전자에는 이런 사본이 가득하다. 갈비뼈, 척추뼈, 팔다리뼈 등 인간을 비롯해 많은 동물의 골격은 전반적인 설계가 비슷하다.(187쪽) 이는 여러 동물의 각기 다른 사지 골격이 태고의 골격 배열을 베끼고 변주해 각각 생겨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각, 후각, 호흡, 단백질 생성 등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자들도 모두 복제된 것들이다.(200쪽)

나아가 인간의 전체 게놈 중 3분의 2 이상이 이렇게 복제된 사본이다. 이 정도면 뼈든 기관이든 유전자든 베끼고 복사할 수 있다면 굳이 새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두고 저자는 “자연이 작곡가였다면 역대 최고의 저작권 위반자로 등극할 것”이라고 말한다.(199쪽)

돌연변이는 유전자가 복사되고 중복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실수이자 시행착오다. 그런데 진화라는 엔진에는 변이라는 연료가 필요하다. 연료가 많을수록 엔진은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움직일 수 있다. 자연은 이러한 시행착오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새로운 발명의 밑천으로 삼는다.

1940년대 활동했던 독일의 과학자 리처드 골트슈미트는 “최초의 새는 파충류의 알에서 부화했다”고 말할 정도로, 진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변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생명사에서 이 ‘한 번의 변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백 개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작은 변이가 일어날 확률도 비교적 낮은데 하물며 게놈 수백 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222쪽)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1900년대 초 미국의 과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은 옥수수알의 서로 다른 색깔들을 조사하다가 게놈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점핑 유전자를 발견하게 되었다.(208쪽) 그런데 이 유전자는 아주 이기적이다. 오직 자기 사본을 만드는 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 유용한 돌연변이를 게놈 곳곳으로 뛰어다니며 실어 나른다. 점핑 유전자의 이기적인 성질 때문에 게놈 수백 군데에서 변이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231쪽)

우리의 DNA는 우리 조상에게 물려받거나 그저 복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때로 바이러스가 침입했다가 우리 게놈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때 게놈과 바이러스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은 기억과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함부로 침입한 바이러스를 자신의 일부로 삼은 게놈처럼 세포도 병합하고 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1960년대, 예일대학교의 과학자 존 오스트롬은 이족 보행 공룡과 조류의 여러 형질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속이 비어 가볍지만 튼튼한 뼈, 날개 돋친 팔, 경첩 같은 관절, 강한 근육, 빠른 성장 속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공룡은 충분히 새의 조상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주장은 공룡에게 깃털이 없다는 이유로 학계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당시에는 하늘을 날기 위해 깃털이 필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7년 중국에서 깃털로 뒤덮인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그 화석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던 덕분에 깃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지 못하는 공룡에게서 깃털의 존재가 확인되자 그 용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과학자들은 그 깃털이 이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장식용이나 체온 보호를 위한 단열재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어쨌든 그 깃털은 하늘을 날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었고, 오스트롬은 30여 년 만에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50쪽)

깃털은 동물이 하늘을 날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비행이 시작되면서 그 용도가 변경된 것이다. 폐와 팔다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먼 조상이었던 원시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사지로 변할 뼈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폐를 가지고 있어서 공기 호흡을 병행했다.(37쪽) 이처럼 자연의 수많은 발명이 용도 변경(기능의 변화)과 재활용을 통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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