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어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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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어와 민주주의
  • 정병기 영남대·정치학
  • 승인 2022.02.27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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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강의 시간에 학생이 반말로 질문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병기 선생님, 독일 녹색당의 가장 큰 성공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교수님보다는 선생님이 좀 더 친근할 것 같고, 더 친해지면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따라붙지 않을 수 있겠다. 교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빠나 삼촌처럼 친근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토론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 같다.

민음사가 수 개월간 평어 사용을 실험해 그 결과를 《릿터》 지난해 겨울호에 발표했는데,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공동육아 어린이집 등에서도 이성민과 동료들이 내놓은 『예의 있는 반말』(2021)의 구상을 실현한 적이 있다. 『예의 있는 반말』은 디자인 커뮤니티 ‘디학’에서 ‘반말’을 낮춤말이나 비어가 아닌 ‘평어’로 체계화해 사용한 경험을 공동 집필한 책이다.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직원이 영어식 호칭과 평어를 사용한 것이다. 

사실 호격 조사를 생략하고 이름만 부르는 것을 굳이 영어식 호칭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격의 없는 사이에서는 호격 조사 없이 호나 이름만 부른 때가 있었다. 또한 반말을 예의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다.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가족들 누구에게나 반말을 쓰며, 다른 지역에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꼭 존댓말을 쓰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친근하면 반말을 쓴다. 반말이 반드시 하대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법은 지나친 존비어 체계를 갖추고 있다. 경칭을 포함한 존비어 체계는 조선의 권위주의 질서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평민의 경우에는 존비어가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는 않았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양반들은 이들을 ‘상놈’으로 취급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사회의 언어는 그 사회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권위주의 사회에서 복잡한 존비어 체계가 생겨나는 것이지, 존비어 체계가 먼저 있고 권위주의 사회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가족 내에서는 경어가 사라져가는 대신 사회적으로는 자본의 권위를 반영한 극존대법이 사용되고 있다. ‘고객님께서’라는 중복된 존칭, ‘잔돈은 100원이십니다’와 같은 이상한 존대법이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과도한 큰절과 맞물린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과 자본을 존중하는 것일 뿐이다. 갑질 문화는 자본의 권위주의와 다르지 않다.

회사의 위계질서를 존치하면서 평어 사용을 강제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직장인들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법을 바꾸면서 구조를 공략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구조 변화를 염두에 두고 평어 사용을 시도한다면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존댓말을 쓰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호 존중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에도 ‘께서’나 ‘-시’와 같은 극존칭이 있어 상호 존대도 간단치 않다. 교수가 학생에게 “000님께서 말씀해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상호 존대로는 완전한 평어 사용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어 체계도 층층시하다.

평어 사용 전에 상호 존대부터 하는 것은 필요하다. 상호 존대가 완전 평어로 가는 중간 단계인 것만도 아니다. 대선 토론 같은 경우는 존댓말 속에도 칼이 숨어 있다. 이처럼 적대적 토론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상호 존대를 통해 감정을 다스리는 경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서로 친근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경어 체계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극존칭을 배제해 단순화해야 한다.

1990년대로 기억한다. 고학력 중산층 가정을 중심으로 아이들에게 어머니에게도 경어를 쓰도록 가르쳤다. 아버지에게만 경어를 쓰던 당시로서는 여성 인권을 신장하는 흐름의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아버지에게도 경어를 쓰지 않고 부모와 자녀가 모두 평어를 사용한다. 그것을 두고 아이들이 부모를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녀가 더 친근해지고 부모도 아이들을 존중하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상호 존중과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사회 질서다. 평어를 통해 친근한 상호 존중을 완성할 수 있다. 강의 시간에 ‘야자 타임’을 해볼까 싶다.

 

정병기 영남대·정치학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유럽정치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강의·연구교수 및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과 유럽정치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표준정책론』(공저), 『전환기의 한국 사회』(공저), 『정당 체제와 선거 연합: 유럽과 한국』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시인과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시간 환상통』, 『오독으로 되는 시』 등의 시집을 상재하고 영화 분석서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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