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사신의 견문 … 중국과 한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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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사신의 견문 … 중국과 한국 (2)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2.2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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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한국과 중국은 사신이 오가는 교류를 계속해왔다. 사신이 상대방의 나라에 대한 견문을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상당한 불균형이 있다. 한국에 대한 중국 사신의 기록은 둘만 확인되고, 중국에 대한 한국 사신의 기록은 몇 백 종이나 된다. 

관심의 차이는 중국이 선진이고 한국은 후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중국 사신은 한국이 이미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고백을 했다. 한국 사신은 중국의 모든 면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려고 했다. 글을 쓰고 읽는 데서 선후가 역전되었다. 한국인은 중국인보다 글을 더 많이 쓰고 열심히 읽어 앞으로 나갔다.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한국인은 목욕과 세탁을 자주 하고, 중국인의 더러움을 비웃는다고 했다. 국가 도서관에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민간인 마을에도 도서관이 있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하급 군졸이나 어린아이들까지도 선생을 따르면서 공부하기를 놀기보다 더 열심히 한다.” 학구열이 중국보다 앞서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사실을 고백했다. 

명나라의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나은 점을 여럿 들었다. 처음 둘은 “형벌에 궁형(宮刑)이 없다”, “어려서 다친 사람만 내시로 써서, 내시가 아주 적다”라 한 것이다. 생식기를 제거하는 참혹한 형벌인 궁형이 중국에는 흔하고 한국에는 없는 것을 확인했다. 궁형이 흔한 탓에 중국에는 내시가 많아 국정을 농단하는데, 궁형이 없는 한국에는 그런 폐단이 없다고 했다. 한국이 중국보다 월등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 다음에 한 말도 든다. “가장 칭송할 일은 팔십 노인이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궁중에 모시고, 왕과 왕비가 잔치를 베풀고 은공을 치하하는 것이다.” “비록 노복이라도 삼년상을 지내게 한다.” “대대로 양반이라도 떳떳하지 못한 행실을 하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배척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너무 다른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 사신의 중국 견문록은, 명나라에 관한 ‘조천록’(朝天錄)이 140여종, 청나라에 관한 ‘연행록’(燕行錄)이 290여종 전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작자는 사신만이 아니다. 수행원의 저작이 더 볼만하다. 한문본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도 있고, 국문으로 쓴 것도 있다. 중국인은 보지 못하게 하거나, 한문을 모르는 독자 특히 여성도 읽게 하려고 할 때에는 국문으로 썼다. 특기할 만한 것 몇 가지만 든다. 

김육(金堉)은 명나라 말기에 사신으로 가서 견문한 바를 <조경일록>(朝京日錄)에다 적어 남겼다. 육로는 막혀 해로로 가서, 마을마다 귀신을 모셔놓고 요행을 바라는 광경을 보았다. 관원들은 나라의 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돈만 탐냈다.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역사의 전환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사신을 수행한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연기>(湛軒燕記)에서, 한창 시절의 청나라 수도 북경에서 본 것이 기대와는 달랐다고 핵심을 들어 말했다. “그 땅이 검은 구덩이인데, 수레와 말이 닳도록 흔들어, 바람이 일어날 때마다 뿌연 먼지가 하늘을 가린다. 손 하나 사이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풍토가 이렇다는 것이다. 오늘날보다도 더 심하다.


   흉년이 들어 길에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족(漢族) 여자이다. 더러는 대여섯 살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고개를 숙이고 외치라고 한다. “어르신네 한 푼 줍쇼.” 어떤 때는 수레를 잡고 수백 보를 따르면서 쉬지 않고 간절하게 빌면서, 전족(纏足)한 발에 뾰족 신을 신고 나는 듯이 달린다. 간혹 남자 거지도 보였는데, 조각 조각 찢어진 베로 하체만 가렸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고 동상에 얼어 터져 차마 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는 하층민의 고난을 그렸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족(漢族) 여자”라고 한 것은 만주족과 한족,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등이 심각하다는 말이다. “전족(纏足)한 발에 뾰족 신을 신고, 나는 듯이 달렸다”고 한 것은 가혹한 현실이다.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여겨 전족을 하고 뾰족 신을 신어 예쁘게 보이도록 하고서, 먹고 살지 못하게 한 탓에 그런 발로 나는 듯이 달려야 했다. 간혹 보이는 남자 거지는 한족 최하층이었을 것이다. 번영의 이면에 처참한 빈곤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지원(朴趾源)도 사신 수행원으로 가서 문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다. 중국의 실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자세하게 묘사한 것이 각별하다. 조금 길게 인용한다.


   북경 사람 하류 중에 글자를 아는 자가 매우 드물다. 문서를 다루는 하급 관리에는 남방의 못 사는 집 아들이 많다. 얼굴이 초라하고 야위며, 풍후한 자가 없었다. 봉급을 받기는 하지만 극히 적어서 만리 객지에서 생계가 쓸쓸하고, 가난하고 군색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 있다. 
   우리 사행이 갈 때면 서책이나 필묵의 매매는 모두 이 패거리가 주관해 중간에서 장사를 하며 남은 이문을 먹는다. 역관들이 그 동안 있었던 비밀을 알려고 들면 반드시 이들을 통해야 하므로, 거짓말을 크게 퍼뜨리고, 일부러 신기하게 꾸며서 모두 괴괴망측한 소리로 역관들이 지닌 남의 돈을 우려먹는다.
   요즈음의 형편을 물으면, 아름다운 일은 숨기고 나쁜 것들만을 꾸며내 말한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요망한 사람, 괴이한 물건 전에 없던 것이 나타났다고 한다. 변새가 침공당하고 백성들의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나라가 망하는 재앙이 목전에 닥쳤다는 글을 장황하게 써서 역관에게 준다. 역관은 이것을 사신에게 바치고, 서장관이 받아 정리해 귀국 보고 별지에 적어 임금에게 올린다.


별지만이 아닌 전문을 국문으로 쓴 연행록도 있었다. 서유문(徐有聞)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을 국문으로 쓰고, “우리 땅이던 요하(遼河) 이동을 오랑캐에게 내주고 해동(海東) 일우(一隅)에 국척(跼蹐)해 있는 처지”를 한탄하는 말을 자주 했다. “오랑캐”란 청나라만이 아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를 다 말했다고 할 수 있다. 한문으로 쓰면 그쪽에서도 볼 수 있어 하기 어려운 말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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