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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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법당’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2.02.1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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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30년도 더 지난 라떼 한 토막. 1987년 봄, 나는 어찌하다 내가 적을 둔 대학원의 학생회 비슷한 기구의 장이 되었다. 무슨 사명감이나 권력의지에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어렵사리 기구를 만들었는데 자리를 맡을 사람이 없다는 후배들의 항의에 우유부단했던 때문이었다. 지도교수께 인사차 말씀드렸다가 ‘공부는 접었느냐’는 꾸중을 들었다. 아무튼 거리에도 나가고 하면서 ‘6월’을 보냈고,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가을이 되자 선거 바람이 그 기구의 일꾼들—명칭은 ‘대의원’쯤이었을 것이다—에게도 불어닥쳤다. 회의를 열면 대학원이 빨리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며 ‘독자 후보’, ‘비판적 지지’, ‘단일화’ 주장들이 맞섰다. 나는 우유부단하게도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자, 일꾼들은 무능한 회장과 무용한 기구를 규탄하며 차례로 발걸음을 끊었다. 지지율이 하락한다 싶은 후보에게는 어김없이 막대한 정치자금이 들어간다는 풍문도 있었고, ‘4자 필승론’이라는 해괴한 주장도 있었다. 12월의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그 당의 정체성이 민주와 정의라고는 당원들조차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의 후보인 육군 대장 출신의 노태우는 36.6%를 득표하여 (투표율은 무려 89.2%였다) 대통령이 되었다. ‘죽 쒀서 개 줬다’는 열패감과 자괴감 속에 서너 명의 동료들과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 기구를 해산할 수도 인계할 수도 없었다.

내가 뒤늦게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국민의 힘’의 전신(前身) 정당이 1987년 6월 항쟁이나 12월의 대통령 선거 때 파산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당을 청산할 기회는 박근혜 탄핵 때 한 번 더 있었다. 그렇지만 내 믿음이 무색하게 그 당은 지금도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심지어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책임을 묻고 과거를 청산하는 역사를 만들기에는 대안 세력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그 당은 정권 장악을 유지하기 위해 심지어 ‘3당 합당’도 마다하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 때마다 외부 ‘명망가’를 끌어들여 후보로 내세워 왔다. 정당성과 정통성을 갖춘 지도자를 내부에서 키우기에는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기회주의적인 친위 인사들을 동원하여 조립한 정당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당의 뼈대이던 정치군인 세력이 약화하자 앞세울 간판이 마땅치 않게 되었고, 그래서 이리저리 평판을 얻은 법률가, 기업가, 독재자의 딸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법이 정한 임기를 혼란스런 이유로 도중에 내던진 분을 후보로 내세웠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까지는 명망가들을 정치나 행정 영역에서 나름 수련을 거쳐 내세웠지만 이번에는 30여 년을 오로지 ‘특수한’ 범죄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일에 종사해온 인사를 숙려기간이나 탈색 기간도 없이 선거판에 투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보가 기대를 어기지 않고 무지와 무모를 자랑하자 ‘가만히만 있으면 당선된다’며 ‘연습문제’를 풀고 ‘연기만 하라’고 감독한다. ‘국민이 불렀다’며 등장한 그 후보 또한 ‘무엇’이냐고 물으면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답하고 ‘어떻게’를 물으면 ‘더 생각해 보겠다’고 답하는 준비되지 않은 연기이기는 하지만 해독하기 어려운 거두절미 7글자 대사로 감독을 충실하고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조차 한때 ‘육법당(陸法黨)’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 당의 정체성에 낯선 일이 아니다. 육사 출신 세력이 소멸한 뒤 마침내 법대 출신 세력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등장하는 장면도 전두환이 육군 대장 군복을 벗고 닷새 만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과거와 다르지 않다. ‘상식과 공정, 법치’의 구호는 ‘정의사회 구현’을 상기시킨다. 그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너무 겁이 없다”며 모순어법으로 검찰정치 본색을 드러냈다. “대검과 서울중앙지검 앞에 모인 수만 명이 검찰을 상대로 협박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과거 같으면 사법처리될 일인데 정권이 뒷배가 되어서 그런지 마음대로 한다. 그러니깐 모든 게 다 무너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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