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그리고 구원: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다시) 읽기
상태바
죄와 벌, 그리고 구원: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다시) 읽기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1.30 15: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교양서20 제19강〉_ 김연경 박사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덟 번째 시리즈 ‘교양서20’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교양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인간 교육, 즉 교양 교육이나 인성 함양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도서다. 교양의 내용은 자기 수양의 지혜를 넘어 그리고 동양이나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넘어, 인간과 세계와 자연과 우주에 관계되는 넓은 독서를 포함한다. 전체 20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자기 수련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필요와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우주의 구성을 느낄 수 있고 알게 하는 기초적인 교양 도서 20권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3. 문학 제19강 김연경 박사(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강연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죄와 벌, 그리고 구원: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다시) 읽기


김연경 박사는 “F. M.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장편”이자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소설”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깊이 있게 소개한다. 우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친부 살해를 다각도에서 심도 깊게 다룬 소설”이라고 평하면서 전작 장편들로부터 “한층 진일보하여 인물들의 모종의 역할 분담에 성공, 구성의 균형 감각을 높이고 주제의 다층위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세 아들(스메르댜코프까지 포함하면 넷이다)”이 “각기 그 나름으로 구성적 축을 형성함과 동시에 특정한 주제를 대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먼저 장남 드미트리(28세)는 “‘감성’(열정)의 축”으로서 “소위 외적 플롯”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성’(지성)의 구현”이자 “소설의 관념과 사상, 즉 소위 내적 플롯”을 맡은 둘째 이반(24세)을 통해서는 “작가가 평생 동안 천착해온 주제(죄와 벌, 구원, 불멸, 신 등)를 드미트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막내아들인 알료샤는 ‘신성’(영성)의 축을 형성함으로써 이반의 대극”에 위치해 있고, “순서상 이반의 형인 스메르댜코프는 가장 육체적인 방식으로 살부를 실현하는, 어둠의 육화 같은 느낌을 주는 의미심장한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지난해 12월 11일, 김연경 박사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교양서20>의 1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인간 도스토옙스키: 가난, 유형, 간질, 도박

주지하다시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하, 『카라마조프』)은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 F. M.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장편이다. 그는 1821년 10월 30일(신력 11월 1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881년 1월 28일(신력 2월 9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이었던 그의 삶을 먼저 살펴보자. 총 네 개의 핵심어를 뽑아볼 수 있다.

우선, 가난 혹은 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등단작의 제목(『가난한 사람들』, 1846)을 상기한다면, 20대 문청의 화두가 ‘가난’과 ‘인간’, 그것도 복수로서의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마린스키 자선 병원의 의사로서 모스크바 근처에 조그만 영지(다로보예)를 가진 소지주였다. 부유한 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와는 달리, 전형적인 잡계급 출신인 그는 페테르부르크 공병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무원(무관)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직장을 버리고(최종 계급은 소위보였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순간 가난은 그에게 숙명이 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도스토옙스키는 ‘매문(賣文)’을 수치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떳떳이 주장하는 쪽을 택한다.

“돈을 미리 받지 않고 작품을 팔아본 적은 평생 단 한 번도 없습니다. (...) 나는 문학가-프롤레타리아이므로 누군가 나의 작품을 원한다면 먼저 나의 생활을 보장해주어야 합니다.”(1863년 9월 18일(30일) N. N. 스트라호프에게 보내는 편지.)

‘문학가-프롤레타리아’, 즉 ‘노동하는 문학가’ 선언은 대부분의 작가가 지주 귀족이었던 19세기에 정녕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훗날 문학사의 평가대로 그는 ‘문학’과 ‘문학함’을 ‘겸업’이 아닌 ‘전업’, 진정한 ‘업(業)’의 경지로 끌어올린 최초의 작가다. 그럼에도 정작 그가 받은 원고료는 다른 귀족 작가보다 적었다. 가난과 신분 콤플렉스, 열등감과 자만심을 오가는 극단적인 성격은 평생 작가를 괴롭혔다.

둘째, 사형 선고와 8년에 걸친 유형 생활이다. 1848년, 도스토옙스키는 전도유망한 신예 작가로서 『가난한 사람들』 이후 「분신」, 「여주인」, 「백야」, 「약한 마음」 등 많은 중단편 소설을 써냈고 장편소설(『네토치카 네즈바노바』: 미완)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사회주의자 페트라솁스키의 모임(‘금요일’ 모임)에 출입하다가 체포,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불온한’ 편지를 낭독한 것을 포함하여 몇몇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애초부터 일벌백계 차원에서 연극처럼 계획됐던 사형 집행은 극적인 순간에 취소되고 이후 4년을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나머지 4년을 사병 신분으로 강등되어 세미팔라친스크의 부대에서 보낸다. 감옥에서 그가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 『성경』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859년 문단에 복귀한 도스토옙스키는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셋째, 뇌전증을 간과할 수 없다. 첫 발작 시기가 정확히 언제였든 간에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주기적으로 뇌전증 발작에 시달렸으며 그 경험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십분 활용한다. 키릴로프의 경우에는 그 조짐이 보이는 정도이지만(『악령』) 스메르댜코프는 그 질환 때문, 심지어 그 덕분에 소설 플롯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카라마조프』). 『백치』의 주인공 므이시킨은 발달 장애에 뇌전증 환자로서 발작이 시작되기 직전, 즉 의식 명멸 직전의 황홀경을 묘사해준다. 이렇듯,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기저 질환을 말하자면 문학적 은유로 격상시켜 순간의 미학 혹은 ‘문턱의 시간’(황홀경=죽음의 체험)을 구축한다.

끝으로, 도박에 대한 열정을 지적해야겠다. 도박은 돈 자체보다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시험과 도전(『노름꾼』)의 동의어이다. 승부가 나기 직전, 도박자는 사형대에 묶여 있는 순간이나 뇌전증 발작 직전처럼 은유적인 죽음을, 예의 그 황홀경과 파국을 체험한다. 그런데 생활인 도스토옙스키는, 일반인들의 편협한 오해나 억측과는 달리, 마냥 허랑방탕한 한량이나 신경증 환자가 절대 아니었다. 물론 그는 타고나길 현실 감각과 재무 능력이 없었고, 말년에 페테르부르크의 한 귀퉁이에 비좁은 아파트라도 한 채 장만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1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알뜰한 살림꾼이자 뛰어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이 맥락에서 그의 도박벽은 일상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분 전환용 취미 활동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체로 전기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작가로서 도스토옙스키는 제법 천운을 타고난 편이다. 하지만 가난, 사형 선고 및 유형 생활, 뇌전증, 도박벽은 그 자체로는 개인사의 불행 내지는 결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변모되는 것은 그가 그 토대 위에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그의 작가 인생을 조망할 때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가 변태와 탈각(脫殼)의 순간을 보여준다면 명실상부한 첫 장편은 『죄와 벌』(1866)이고, 『백치』, 『악령』, 『미성년』 다음에 내놓은 『카라마조프』는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소설이다.

 

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

1) 친부 살해와 카라마조프시나(карамазовщина ) - 표도르 카라마조프

『카라마조프』는 친부 살해(отцеубийство , patricide)를 다각도에서 심도 깊게 다룬 소설이다. 아비 죽이기, 혹은 살부(殺父)는 정치적 차원에서 황제(차르) 죽이기, 즉 혁명을, 나아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신 죽이기, 즉 무신론(니힐리즘/반역)을 두루 아우르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그 선례로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자체로 조건적인 극 장르가 아닌, 최대한의 사실성과 핍진성을 추구하는 소설 장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패륜적인, 고로 선정적인 소재 중 하나인 살부를 다룬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소설이 통속적인 범죄 소설로 전락할 위험이 상당히 크다. 이 무렵,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 이어 『백치』와 『악령』을 쓰면서, 훗날 이바노프가 ‘소설-비극’이라고 명명한 자기만의 소설 문법을 확립한 터였다. 『카라마조프』에서는 앞선 장편에서 한층 진일보하여 인물들의 모종의 역할 분담에 성공, 구성의 균형 감각을 높이고 주제의 다층위성을 담보한다. 즉, 카라마조프 집안의 세 아들(스메르댜코프까지 포함하면 넷이다)은 각기 그 나름으로 구성적 축을 형성함과 동시에 특정한 주제를 대변한다.

우선 장남 드미트리(28세)는 ‘감성’(열정)의 축으로서 아비와의 재산 다툼에 이어 여자 다툼(돈과 여자), 3000루블을 구하기 위한 ‘대장정’(‘미탸의 모험’), 이어 심리와 공판과 투옥과 탈출 계획(‘미탸의 수난’)에 이르기까지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 소위 외적 플롯이 구현된다. 반면 ‘이성’(지성)의 구현인 이반(24세)은 소설의 관념과 사상, 즉 소위 내적 플롯을 담당하며 작가가 평생 동안 천착해온 주제(죄와 벌, 구원, 불멸, 신 등)를 드미트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간다. 막내아들인 알료샤는 ‘신성’(영성)의 축을 형성함으로써 이반의 대극에 놓일뿐더러 무엇보다도 애초 성자전 형식을 빌린 ‘알렉세이 카라마조프의 생애전’으로 구상된 이 소설(현재의 소설은 이것의 첫 부분이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끝으로 순서상 이반의 형인 스메르댜코프는 가장 육체적인 방식으로 살부를 실현하는, 어둠의 육화 같은 느낌을 주는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이 아들들을 엮어주는 핵심어가 ‘카라마조프시나’인데, 아들(들)의 손에 죽는 아비로 설정된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형상과 성격을 살펴봄으로써 그 특성을 짚어보자.

 

현재 쉰다섯 살인 표도르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 혹은 삶에 대한 집착인데, 구체적으론 돈(축재)과 여자(성욕)로 나타난다. 전자에 관한 한, 그는 자본주의의 발달 초기, 사업(술집 경영, 그리고 아마 매춘)을 통해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에게 걸맞게 사업적 수완과 철저한 직업 정신(아무리 술에 취해도 돈을 잃어버리거나 셈을 틀리는 적은 절대 없다)이 돋보이지만 그 저변에 깔린 것은 아무래도 징그러울 정도로 강한 극도의 이기주의이다. 자식들에게 유산 따위는 아예 바라지 말라고 미리 못 박고 늙어서도 ‘사내 노릇’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의 왕성한 성욕은 두 번째 결혼과 (거의 확실시되는) 리자베타 능욕, 현재 그루셴카를 향한 욕망 등으로 나타난다. 세상에 추하고 못생긴 여자란 없다, 찾아낼 능력만 있다면 어떤 여자든 자기만의 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실제로, 스메르댜코프를 빼면 하나같이 미남인 아들들을 통해 유추하건대, 또한 “멸망할 무렵 고대 로마 세도가의 용모”(1, 51)를 보여주는 매부리코와 아담의 사과(목울대)로 미루어보아 그의 전성기 외모는 돈 후안-카사노바의 정체성에 충분히 부합했을 법하다.

요컨대, 표도르는 문학사적 맥락에서 페초린의 중년 버전, 더욱이 최악의 버전인바, 뒤룩뒤룩 살이 찌고 처진 현재의 몰골은 음주와 방탕으로 점철된 젊은 날의 이력을 충실히 반영한다.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알료샤를 앞에 두고 설파하는 이른바 ‘갈고리론’에서 보이는 허무주의(나아가 무신론)이다. 저 세계(내세)를 실체 없이 오직 그림자만 존재하는 세계, 가령 갈고리 자체도 아니고 갈고리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모습으로 상상하는 표도르의 내면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그 특유의 페티시즘과 자기 아이러니가 개입되어 극도로 냉소적인 광대놀음(연극성)이 나온다. 가령 ‘부적절한 모임’(1부 2편)에서 표도르가 보여주는 독설과 농담, 독신(瀆神) 등은 그의 무신론의 희극적 발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대중(조시마 장로를 비롯한 성직자들) 앞에서 자기 비하와 굴욕을 자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 응징과 단죄를 실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수치심’을 버리라는 조시마의 충고가 암시하듯 표도르의 광대놀음의 기저에 깔린 것은 자존감의 결핍, 즉 자신에 대한 수치와 경멸이다. 평생 가면을 쓰고 포즈를 취하며 연극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 희대의 광대조차 그 나름의 실존적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일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렇듯 표도로는 여러모로 문제적인 인물이지만 작가가 그에게 할애한 페이지는 별로 많지 않다. 소설 속 그의 구성적 몫은 아들들의 죄를 완성하는 것인바, 그는 아들 각각에게 그 나름의 카라마조프시나를 나누어주고 일찌감치 죽는다. 그로써 크로노스 신화가 암시하듯, 아들의 목숨을 노리는 아비가 죽어야 아들이 사는 끔찍한 세계가 재현된다.

. . . . .

4) 알료샤의 에피퍼니와 기적-신비에 대한 시험: 기적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가

카라마조프 집안의 막내아들 알료샤는 비단 이 소설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창작을 통틀어 가장 긍정적 인물로 얘기된다. 『죄와 벌』의 소냐 마르멜라도바, 더 가까이는 『백치』의 므이시킨(‘전적으로 아름다운 인간’) 등 그리스도의 문학적 형상을 창조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비로소 결실을 거두었다는 식의 평가이다. 하지만 작가 서문 속 자문자답이 암시하듯, 소설 속의 인물로서 알료샤의 형상은 다소 창백해 보인다. 구성적인 역할도 현재 『카라마조프』 텍스트에서는 부차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두드러지지 않음’이 곧 물이나 공기와 같은 그의 실존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여러 점에서 이반의 대극에 서 있는 그는 말을 하기보다 (죄인의 고해 성사를) 들어주는 인물(고해 신부, 나아가 신)이며 그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기보다는 일어난 사건을 수습하고 해결하는 인물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절규하는 이반과 달리, 가까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실천적으로 사랑하며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서 ‘삶의 논리’에 맞서는 ‘삶’ 그 자체, 말하자면 대심문관의 ‘말’에 맞서는 그리스도의 ‘입맞춤’이 실현된다. 미탸의 표현대로 ‘리얼리즘’ 속에서 빛을 발하는 사랑과 구원이란, 뭔가 거대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알료샤가 보여주듯, 가장 평범한(=건강한) 형상을 띨 수밖에 없다. 그가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를 두루 사랑하고 또 두루 사랑받는 알료샤임에도 전적으로 완벽한 인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이제 막 성년에 이른, 뺨이 발그스레한 어린 청년 특유의 방황과 고뇌를 함께 부여함으로써 —히스테릭한 성격에 지체장애인인 리자와의 연애는 그래서 꼭 필요하다— 지상의 그리스도(신의 사도-천사)로 만든다. 형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과제를 부여받고 ‘시험’에 들게 되는데, 「대심문관」에서 얘기되는 세 유혹(기적, 신비, 권위) 중 두 번째 것인 셈이다. 조시마 장로가 사망하자 알료샤(또 다른 모든 신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시신에서 방향은커녕 시체 썩는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겨 나온다. 여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 파이시 신부와는 달리 어린 알료샤는 ‘정의’의 부재에 분노한다. 라키틴의 비아냥대는 표현대로 “(장로의) 직위도 올려주지 않고 명절맞이 훈장도 안 줬다”고(2, 132) 삐져서 그에게 이끌려 소위 ‘탕녀’ 그루셴카의 집을 찾아가는, 말하자면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를 만나보고는 소문과는 달리 착하고 정겨운 ‘누나’의 모습에 감동하고 —나중에 형수가 되는 셈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양파 한 뿌리”)6)에 깊이 감화된다.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창문과 문을 다 열어놓아야 할 만큼 시취가 심해졌음에도 더 이상 동요하지 않고 독경 중인 파이시 신부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앉는다. 시체 썩는 냄새(육체성)가 조시마의 가치(신성)를 훼손시키지 않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적과 신비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써 기적과 신비를 불러내는 것이다. 이어 그가 평화로운 잠에 빠져 꾸는 꿈, 갈릴래아 가나의 혼인 잔치의 한 장면은 알료샤의 에피퍼니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양파 한 뿌리를, 그것도 작은 양파 한 뿌리를 내놓았을 뿐이란다.... 그래, 우리 일은 어떠냐? 너도, 조용하고 온순한 나의 소년이여, 너도 오늘 갈증에 허덕이는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지 않았느냐. 시작해라, 얘야, 온순한 아이야, 너 자신의 일을 시작해야지...! 우리의 태양이 보이느냐, 너는 그분이 보이느냐?”
“무서워서... 감히 쳐다보질 못하겠습니다....” 알료샤가 속삭였다.
“그분을 무서워하지 말거라. 그분이 무서운 것은 우리에 비해 너무도 위대하기 때문이요 또 그분이 끔찍한 것은 우리에 비해 너무 높기 때문이지만, 그분은 무한히 자비롭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며, 손님들의 기쁨이 끊이지 않도록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새로운 손님들을 기다리고, 또 새로운 손님들을 끊임없이, 정녕 세세토록 불러들이고 있는 거란다. 저기 새 포도주를 가져오는구나, 보이느냐, 그릇을 가져오는구나....”
뭔가가 알료샤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더니 갑자기 뭔가가 그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득 채웠고, 환희의 눈물이 그의 영혼 속에서 솟구쳤다.... 그는 두 팔을 뻗어서 소리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2, 174-175)

그로부터 사흘 뒤 알료샤는 “속세에 머물라”라는 장로7)의 말씀에 따라 수도원을 떠난다.

알료샤와 관련하여 『카라마조프』의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일류샤를 둘러싼 여러 아이들 이야기인데, 카라마조프 집안의 참극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우선, 부유하되 패륜적인 가정(카라마조프)과 가난하되 화목한 가정(스네기료프), 아비를 수치스러워하는 아들들(드미트리, 이반 등)과 정반대로 아비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일류샤) 등의 대립이 도드라진다. 지적인 허영에 사로잡힌 소년 콜랴 크라소트킨은 이반 카라마조프의 유년을 짐작케 하는, 그의 어린 분신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에필로그」의 맨 마지막, 알료샤와 함께 이 아이들이 모두 등장한다. 결국 죽고 만 일류샤의 장례식을 끝낸 다음 콜랴는 의구심을 내비친다. “모든 게 참 이상해요, 카라마조프 씨, 이렇게 슬픔이 있는데 갑자기 무슨 블린(핫케이크) 같은 것이 나오다니, 우리의 종교로 봐도 참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아요!”(3, 549) 하지만 이에 대한 알료샤의 대답, 나아가 소설은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의 모순과 대립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다. 가령 평소에 단 것과 기름진 음식을 먹고 부인네들과의 만남을 즐긴, 요컨대 육체를 억압하지 않은 조시마를 찬미하고 오히려 고행과 금욕을 실천한 은둔자 형 수도승 페라폰트 신부를 희화한 것—자신이 평민 출신에 하급 승려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도 내보인다—에서 보이듯, 알료샤—나아가 작가—는 ‘지상의 빵’을 결코 멀리하지 않는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산 자의 쾌락 향유가 서로 모순되지도 않는다. 덧붙여, 이반이 추상적인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하여 신에 대한 반역을 선언한 반면 알료샤는 정반대로 구체적인 한 아이(일류사)의 죽음을 근거로 총체적인 화합을 역설하는 것도 강조되어야 할 대목이다.

“자, 이제 말들은 그만 하고 일류샤의 추도식에 가 봅시다. 우리가 블린을 먹는다고 해서 당혹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영원한 풍습이고, 여기엔 좋은 점이 있습니다.” 알료샤가 웃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갑시다! 자, 이제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갑시다.”
“영원히 이렇게, 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카라마조프 만세!” 콜랴가 다시 한 번 환희에 차서 이렇게 외쳤으며, 다른 소년들도 전부 또 다시 그의 외침에 화답했다.(3, 555)

이것이 『카라마조프』의 마지막이다. 그리스도(알료샤)와 열두 명의 사도(아이들)를 연상시키는 이 교조적인 장면에서 구원, 영생과 부활을 향한 작가의 강한 열망이 드러난다. 요컨대 진정한 부활이란 일류샤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은 이 아이들의 앞으로의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 집안에 초점을 맞춘다면 아비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은 아들들(형제들!)의 삶이야말로 아비의 희생을 보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여기서 소설 속에서 조시마를 통해 언급되기도 하는, 『카라마조프』의 제사이기도 한 ‘한 알의 밀알’이 상기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서 12: 2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