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자가 부추기는 ‘상징입법’ 혹은 ‘입법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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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가 부추기는 ‘상징입법’ 혹은 ‘입법농단’
  • 박성호 한양대·법학
  • 승인 2021.03.0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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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변호사로 17년 가까이 활동하다가 교수로 전직한 뒤로는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다. 다른 학자들이 쓴 책과 논문을 읽다 보면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다. 단순한 지식을 넘어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관점이나 자세를 배우게 된다. 공부 좋아하는 이들에게 대학은 지상천국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남이 쓴 글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기쁨은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 특히 비교법학적 관점에서 외국의 법 제도와 실무를 상세하게 분석 검토한 연구서를 접하게 되면 저자의 학문적 성실성은 물론이고 그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식체계에 저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그런데 법학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이들 연구서 중에는 너무 쉽게 ‘입법론’을 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외국에 이러저러한 법 제도가 있는데 이는 우리가 직면한 이러저러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혹은 어떤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 주장이 받아들여져 실제 입법(안)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은 지적재산법 분야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어느 법학자가 논문이나 용역과제에서 자신의 주장을 입법론으로 제시하면, 얼마 후 법률안이 만들어져서 정부입법안이나 의원입법안 형태로 국회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날 불쑥 아무런 ‘입법이유서’도 없이 법률로 제정된다. 이처럼 ‘입법이유서’ 없는 부실 입법은 우리 주변에 흘러넘친다.  

<상징입법―겉과 속이 다른 입법의 정체>라는 책에서 서울대 홍준형 교수는 “문제해결에는 거의 또는 전혀 효과가 없고 … 겉만 번지르르한 법을 만들어 대중을 현혹하거나 우롱하는 경우”를 ‘상징입법(symbolic legislation)’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그러면서 주권자인 국민은 “입법자가 자행하는 일종의 ‘입법농단’의 실상을 더 소상히 객관적으로 보고받을 자격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실제로 국회의원들이나 공직자들은 “자신이 관여한 입법의 잘못이나 부실에 대해서는 일절 책임이나 반성이 없다”고 일갈한다. 

국회의원이나 공직자에게만 상징입법의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부실 입법이 빈발하는 사태의 근본 원인은 ‘입법론’을 남발하는 법학자들에게 있다. 이들은 법학자의 본령이 ‘해석론’을 펼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고, ‘얼리어답터’를 자처하며 새롭고 신기한 외국 법 제도를 발견하면 이내 ‘입법론’으로 내달린다. 

아무리 훌륭한 외국의 법 제도라 하더라도 우리와는 다른 사회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해당 법 제도가 우리 사회의 문화·경제·역사적 배경이나 생활감정에 부합하는 것인지, 또한 우리 기존 법률체계 속에서 무리 없이 잘 작동될 수 있는 것인지를 시간을 두고 다각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이는 일종의 디버깅(debugging) 작업이다. 법률안과 이를 뒷받침하는 ‘입법이유서’는 이러한 논의 과정 속에서 체계적인 연구 검토를 거쳐야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 입법이유서는 단순한 조문 해설서가 아니다.

이제 분명히 하자. 우리 사회에 쓸모없거나 ‘기능부전’의 상징입법이 속출하는 배후에는 이를 부추긴 일부 법학자의 경솔부박(輕率浮薄)함과 이를 방치한 대다수 법학자들의 나태함이 결정적으로 한몫했다는 것을. 그러한 점에서 우리 법학자들은 그간 저질러진 상징입법 혹은 입법농단의 실태를 제대로 짚어보고 반성하는 자세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5년부터 대한변호사협회가 세 번에 걸쳐 <입법평가보고서>를 펴낸 바 있으나 실무가들이 작성한 간단한 보고서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그간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그보다 더 심각한 ‘입법농단’에 대해 모르는 척 눈감아 왔다. 이대로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법·법·법 시리즈’에는 ‘좋은 법’보다 ‘나쁜 법’, ‘이상한 법’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박성호 한양대·법학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1984년) 사법연수원(15기)을 수료하였다. 지적재산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1988년~2004년) 교수로 전직하여(2004년) 현재까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지적재산법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단독 저서로는 변호사 시절 쓴 논문들을 선별하여 펴낸 <저작권법의 이론과 현실>, 법학박사 학위논문(서울대학교)을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펴낸 <캐릭터 상품화의 법적 보호>, 법학전문대학원 학생용 교과서로 펴낸 <저작권법>, <문화산업법> 등이 있다. 분담집필 형태의 공동 저서로는 <저작권법 주해>, <부정경쟁방지법 주해> 등 주해서를 비롯하여 다수의 전문연구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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