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서 '알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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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서 '알기'로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1.03.0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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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_ 논설고문 칼럼

‘공부’라는 말을 교육과 학문의 통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이 멍청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따질 것을 따지고,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학문이 직무유기를 한다.

‘공부’란 ‘工夫’라는 한자어에서 온 말이다. ‘工’은 ‘만들다’는 뜻이고, ‘夫’란 ‘일하다’는 말이다. 두 자가 합쳐져 ‘물건을 만들기’를 일컫다가, ‘무술을 연마하기’까지 나아간 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전용해 사용한다. 궁색한 편법이다.

이런 내력을 알기 어렵고, 알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별것 아닌 사실을 길게 끼적이는 고증 취미를 대단한 학문이라고 여기는 풍조를 배격해야 한다. 작은 시비에는 말려들지 말고, 큰 근심거리는 맡아서 해결해야 한다.

‘공부’가 소종래를 모르고, 뜻이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말이 된 것은 큰 근심거리이다. 교육과 학문이 혼미를 거듭하는 원인일 수 있다. 한자를 버리고 ‘공부’를 국문으로만 표기하면 적폐를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한다고 할 수 없다.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말을 써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육도 학문도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일이다.

‘공부’는 버리고, 대신 쓸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놓고 거창한 학술회의를 열어도 좋겠으나, 말이 많으면 미궁에 빠질 염려가 있다. 주장이 엇갈려 문제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 여러 외국인의 고명한 학설을 늘어놓다가 배가 산으로 가는 것도 흔히 본다.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이 혼란을 먹거리로 삼는 것이 부끄럽다.

남들을 나무랐으면, 나는 분명하게 말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안다. ‘공부’를 대신할 말이 ‘알기’라고 말한다. ‘알기’는 ‘알다’의 명사형이므로, 무슨 말인지 누구나 안다. ‘알기’는 ‘살기’와 짝을 이루어, ‘공부’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공부’는 모두 하나인 것처럼 생각되는데, ‘알기’는 ‘배워 알기’, ‘찾아 알기’, ‘깨달아 알기’ 등으로 나누어 살피고 진행할 수 있다. 

‘공부’를 어느 경우에든 ‘알기’로 바꾸어 말할 수는 없다. ‘공부해라’를 ‘알기해라’라고 하면 우습다. ‘공부’는 시켜서 하지만, ‘알기’는 스스로 하므로 명령어를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 한다’와 ‘알기를 잘 한다’는 뜻이 다르다. ‘공부를 잘 한다’는 평가된 성적을, ‘알기를 잘 한다’는 지닌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부’란 말을 아예 버리고 ‘알기’라고만 할 수는 없다. 두 말을 함께 쓰면서 ‘공부’에서 ‘알기’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알기’는 각자 지닌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 하는 일이며, ‘배워 알기’에서 ‘찾아 알기’로, 다시 ‘깨달아 알기’로 나아가 더 잘 하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결론인가? 아니다. ‘배워 알기’, ‘찾아 알기’, ‘깨달아 알기’가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슬기롭게 찾아야 한다. ‘공부’가 멍청인 것을 이유로 삼고 한자어는 불신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말만 캐고 있지 않고, 한문 고전에 뛰어들어 오랜 논란에 참여하면 얻을 것이 더 많다. 오랜 내력을 가진 유가·불가·도가의 논란을 마음속에서 재현할 필요가 있다.  

유가는 ‘배워 알기’를 ‘聞道’(문도)라고 하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論語>)고 했다. 알기를 위한 열망을 표출하면서 스스로 아는 ‘찾아 알기’나 ‘깨달아 알기’는 말하지 않았다. 불가는 ‘찾아 알기’를 ‘見非相’(견비상)이라고 하고, “만약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면, 바로 부처를 본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金剛經>)라고 했다. 이것은 안다고 자부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이다. 도가는 ‘깨달아 알기’를 ‘觀妙’(관묘)라고 하고, “언제나 없음으로 그 묘함을 보고자 한다”(常無欲觀其妙, <老子>)고 했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방법의 모색이다.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은 틀렸는가? 셋 다 맞으면서 모자란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상대방은 틀리고 자기는 맞다고 하면서 패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진지한 탐구는 하지 않고, ‘알기’에 관한 견해차를 차등의 논거로 삼은 횡포에 휘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셋 다 맞으면서 모자라, 차등을 물리치고 대등을 확인하게 한다고 다시 말해야 한다. 

‘배워 알기’ ‘聞道’가 맞으면서 모자라, ‘찾아 알기’ ‘見非相’으로 나아간다. ‘찾아 알기’ ‘見非相’이 맞으면서 모자라, ‘깨달아 알기’ ‘觀妙’로 나아간다. ‘깨달아 알기’ ‘觀妙’도 맞으면서 모자란다. 좋은 방법이기만 하고 실체나 결론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되돌아가야 하는가? 앞으로 나아가 새 길을 찾아야 하는가? 양쪽이 반대인가, 하나인가?

이런 원론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는 것은 미루어두자. 힘들기 때문이고, 마무리가 가능한지 의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 말을 ‘알기’를 구체화를 위한 문제의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슬기롭다. 원론과 각론, 거시와 미시를 함께 갖추고자 하고, 당장은 미시의 각론, 장차는 거시의 원론에서 성과를 올리는 것이 좋은 작전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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