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왕의 목이 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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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왕의 목이 잘리지 않았다!”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1.03.0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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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_ 대학직설

지난 3월 4일, 마침내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했던 줄다리기 싸움이 끝났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결국 사표를 낸 것이다. 단 1분 2초간 이어진 그의 ‘사퇴의 변’을 들어보자. 

   저는 오늘 총장을 사직하려고 합니다.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정신과 법치시스템이 지금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오로지 국민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상식과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기 어렵습니다. 검찰에서의 제 역할은 지금, 
   이제까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해왔듯이, 앞으로도 제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동안,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셨던 분들, 또 제게 날 선 비판을 
   주셨던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윤 총장의 사퇴는 전날인 3일 대구고·지검을 방문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완판(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함)’이라는 신종 유행어를 선보인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한 인터넷 언론에 “윤석열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헤드라인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매체가 뽑아 든 헤드라인은 “‘별의 순간’ 선택한 윤석열… 공정·정의 내세워 대선 뛰어드나”였는데, 주지하듯이 그것은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월 추·윤 갈등의 정점에서 윤 총장의 지지율이 고공행진 할 때 그에게 ‘별의 순간’이 온 것 같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충청도 사람인 윤 총장은 사퇴 전날인 3월 3일 대구 방문 시에 “대구가 고향 같다”라는 감성적 표현을 통해 이미 자신의 정치적 ‘좌표’를 찍었다. 그 표현은 어쩌면 그를 마중 나온 환영인파 속에서 ‘윤석렬대통령’이라는 팻말을 본 순간 감정이 북받쳐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반사적 언어행위였을 수도 있다. 굳이 정신분석가들의 전문지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작동방식 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 그날 윤 총장의 표현은 바로 ‘대구시민 여러분,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바람이 잠재의식에 침전되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일 터, 실제로 그것은 그의 대선 출정 신호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우리 정치판에서는 충청도 출신 후보가 영남 표를 등에 업거나, 영남 후보가 충청도 표를 얻으면 ‘부’가 있다고들 하지 않던가. 

윤 총장의 사표 제출 이후 겨우 한 시간 남짓, 청와대의 사표 수리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십여 분 후 얼마 전 갑작스러운 사직 의사 표명으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신현수 민정수석의 사표 수리 소식까지 덤으로 날아들었다. 사실 이 같은 속전속결의 일 처리 방식은 문재인 대통령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 이번만큼은 이례적이었다. 청와대도 다 계획이 있었나 보다. 

“검찰에서의 제 역할은 지금, 이제까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해왔듯이, 앞으로도 제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윤 총장이 내놓은 이 대(對)국민 메시지가 꽤 의미심장하다. 사직 전날은 대구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우리 ‘국민’을 갈라치기 하더니 사직 당일 검찰청 앞에서는 돌연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180도 다른 태도로 선회했다. 그가 왜 하필 총장직을 던지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국민을 운운하는지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건지 알 길이 없지만, 무엇보다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가 말한 ‘국민’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정말 헷갈린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윤 총장 사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답해야 한다.”, “총장의 사퇴에도 이 정권이 폭주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제 온 국민이 나서서 불의와 싸울 때가 왔다”라며 역시 ‘그다운’ 주장을 내놓았다. 여기서도 또 뜬금없이 ‘국민’이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이 아니라 ‘국민’의당 대표의 동원령을 받고 함께 ‘나서서 불의와 싸울’ 국민이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에서 ‘국민’은 동네북의 다른 이름이고, 뭇 정치꾼들이 입맛대로 불러 재끼는 ‘편리한’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불과 5년 전 위대한 촛불혁명을 일으켜 전근대적인 현대판 군주의 왕위를 박탈하고 정말로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시대의 문'을 스스로 열어젖힌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킬 수 있으며, 우리 아닌 다른 누구의 힘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나설 때를 알고 물러설 때를 알며, 우리 자신 아닌 다른 누구도 우리를 싸움터로 불러낼 수 없다. 분명 윤석열과 안철수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고 수준이 여전히 전근대적 군주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왕의 목을 잘랐지만, 우리의 사고 속에서는 아직도 왕의 목이 잘리지 않았다.” 미셸 푸코의 이 말이 귓가에 맴돈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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