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개악은 안 된다
상태바
도서정가제 개악은 안 된다
  •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 승인 2020.10.04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베르타스]
▲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관계자들이 지난달 24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정부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관계자들이 지난달 24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정부의 ‘도서정가제 개정안’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지난 두 달간 ‘도서정가제 개악’ 논란이 거셌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작년 여름부터 책의 생산‧유통‧소비자 단체 등과 함께 1년간 협의 끝에 합의한 도서정가제의 ‘현행 유지’ 결정을 7월 말에 갑자기 재검토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작가, 출판사, 서점, 도서관, 독서 관련 36개 단체가 참여한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는 결연한 반대 입장과 함께 합의안의 이행을 촉구했다. 8월 말에는 한국작가회의가 도서정가제 개악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청와대, 국회, 정부 세종청사 앞에서는 공대위의 1인 시위도 이어졌다. 언론에서는 전례 없이 다양한 필자들이 도서정가제 개악을 우려하는 칼럼이 이어졌다. 이 열기만 보면 2014년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 전후의 찬반 논의보다 더 뜨거운 사회적 관심사로 부상한 듯하다.

그렇다면 문체부는 민간단체들과 합의한 ‘현행 유지’ 결정을 왜 갑자기 뒤집으며 재검토 논란을 자초했을까.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일종의 규제 조항인 도서정가제 규정을 문체부 장관이 3년마다 재검토하여 개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문체부는 일종의 의무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민관 협의기구를 만들어 운영했고, 최대 공약수를 모은 합의안을 도출한 것이다. 할인이 없는 완전한 도서정가제부터 도서정가제 폐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의제의 성격상 ‘현행 유지’ 결정은 거의 예정된 결론에 가까웠다. 약간 보완된 점은 재정가 책정 기간(출판사가 책의 정가를 변경하여 다시 매길 수 있는 최소 기간)을 현행 18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하고, 도서관에 적용하던 10% 할인 한도 이외의 마일리지 적용(통상 5%)을 삭제하기로 한 점이다. 도서정가제의 최대 쟁점인 할인율 조정이나 할인 범위 등이 아닌 사항에 대해 약간의 보완책을 마련한 수준이다. 이런 합의 사항을 청와대 보고를 거쳐 법 개정안으로 제출하려던 것이 문체부의 도서정가제 조항 개선의 수순이었다.

하지만 청와대 보고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마침 부동산 정책 등으로 국정 지지율이 하락하던 상황에서 도서정가제의 ‘현행 유지’ 결정이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청와대가 ‘소비자 후생’을 더 고려하도록 문체부에 재검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유력한 관측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문체부가 주도한 민관 협의체의 합의안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생겨날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도서정가제 폐지’ 주장이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문체부 장관이 답변에 나섰던 사안이 청와대의 재검토 압력을 낳은 배경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문체부가 제시한 개정안의 내용은 ▲문체부가 주최 또는 예산을 지원하는 도서전에서의 도서정가제 적용 제외 또는 할인율 확대, ▲발행 후 3년 경과 도서, 마지막 서점 주문으로부터 1년이 지난 도서의 도서정가제 적용 제외, ▲전자출판물의 총 할인율을 15%에서 20%로 확대하고, 연재 중인 콘텐츠는 도서정가제 적용을 유예하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민관 합의안에 더해 종이책과 전자책의 할인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출판‧문화계는 즉각 반발했다. 조만간 정부안이 최종 확정 발표될 것이고, 이후 국회에서 개정 절차를 밟아 새로운 도서정가제가 결정될 것이다.   

이번 사태는 문체부와 민간의 오랜 논의를 거친 합의안에 대해 청와대가 불필요하게 개입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청와대 개입이 없었더라면 민관 합의안대로 ‘현행 유지’의 틀로 큰 논란 없이 지나갔을 사안이다. 도서정가제를 책 생태계의 관점이 아닌 국정 지지율의 관점에서 규율하려 한 청와대의 오판이 사태를 키웠다. 이로 인해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문화정책 담당 부처인 문체부의 권한과 정체성을 청와대가 무시하고 압박한 것은 큰 문제다. 

만약 정부의 개정안이 현실화되면 어떻게 될까. 출판시장이 개정법 시행 전인 6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 구간 할인이 횡행할 것이며, 대폭 할인 경쟁이 어려운 작은 출판사와 서점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베스트셀러도 구간 도서 목록이 지배할 것이다. 웹툰과 웹소설에서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연재 중인 콘텐츠를 정가제의 예외로 하거나, 종이책보다 전자책에 할인율을 더 적용하는 것도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려운 할인 지향적 발상일 뿐이다. 책 생태계 이해관계자 중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개악이 될 것이다.

문체부와 청와대는 민관 합의안대로 ‘현행 유지’를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회에서 또 다른 논란만 키울 것이다. 전자책에 대한 별도의 정가제 규정 마련을 포함한 세부 현안들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논의를 통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도서 가격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3년마다 푸닥거리를 하도록 한 재검토 조항도 폐기해야 한다. 법은 필요할 때 언제든 개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야말로 불필요한 규제 조항이다.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로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겸 출판정책연구회장, 일본출판학회 정회원이다. 대학에서 출판문화론 등을 강의한다.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화체육관광부 규제개혁위원, 서울도서관 네트워크 위원장, 경기도 지역서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출판산업사』를 썼고, 옮긴 책으로 『서점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책』, 『책의 소리를 들어라』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