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예술가와 철학자들에게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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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예술가와 철학자들에게 말을 걸다
  • 이승종 연세대학교·철학
  • 승인 2020.10.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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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

■ 저자가 말하다_ 『우리와의 철학적 대화』 (이승종 지음, 김영사, 460쪽, 2020.08)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공자의 『논어』가 예증하고 있듯이 동서를 막론하고 철학은 대화를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사유는 대화에서 싹튼다. 대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인데 이해와 돌아봄(반성)이 곧 사유인 것이다. 3인칭에 머물러 있던 타자는 대화 상대자가 되면서 2인칭으로 격을 달리해 사유에 동참한다. 대화는 3인칭과 1인칭으로부터 2인칭이라는 새로운 시점을 창출하는 획기적 사건이다.

대화로 말미암아 사유는 더욱 예리하고 풍성해진다. 서로의 견해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사안에 대한 시각의 다양성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견해를 점검하게 되고, 상대의 견해가 노정하는 장단점을 통해 사안을 보다 입체적으로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논증이나 비판은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로서 그것 역시 대화에 부쳐져야 한다.

반면 대화의 부재나 단절은 2인칭의 부재나 소멸을 야기한다. 서로는 서로에 대해 굳게 잠긴 문이 된다. 대화가 없는 상대는 나와 엮일 일 없는 3인칭 타자일 뿐이다. 대화를 한다 해도 그것이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면, 앞서 살펴본 의미에서의 2인칭적 대화로 보기는 어렵다. 상대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가르침은 대화의 2인칭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읽은 글들에 내 생각을 섞어본 책을 지어냈다. 그것은 3인칭으로 주어진 글과 1인칭인 나 사이의 2인칭적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3인칭적 텍스트와 1인칭적 생각의 접점에서 양자를 넘어서는 어떤 돌파구를 찾으려 한 것이다. 동과 서를 가리지 않고 내 관심이 이끄는 글을 찾아 읽었지만, 지금까지 지어낸 나의 책이 준거하고 있는 글의 저자들은 모두 먼 과거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내가 걸어온 철학의 길에서 만난, 내게 영향을 미친 동시대 사람들로 대화 상대자의 범위를 설정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20세기와 21세기 한국이라는 지역성과, 철학이라는 주제가 기준이 되었다.

책의 얼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부에서는 한국 현대철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현대철학의 면모를 조망하는 글들을 통해 현대철학의 지형도를 그려본다. 1장(동일자의 생애)에서는 전통 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의 이행을 동일자에서 타자로의 주제 변환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2장(한국현대철학의 지형도)에서는 서양현대철학이 한국에 수용되면서 형성된 한국현대철학의 지형도를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사이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그려본다. 3장(철학과 사회)에서는 분석철학이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과 현황, 한국철학의 정체성 문제, 학제 간 연구와 융합연구, 역사철학 등의 주제를 대화로 풀어내고, 4장(철학사의 울타리와 그 너머: 로티와 김상환 교수)에서는 대표적 탈현대 사상가로 국외에서는 로티를, 국내에서는 김상환 교수를 택하여 이들의 탈현대적 철학사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2부를 시작하는 5장(고유섭의 미술철학)은 고유섭의 저술들에 대한 독해를 통해 우리 예술사의 철학을 살펴보며, 이 과정에서 우리 학계가 전통으로부터 전수받은 문화소文化素들의 함축과 한계를 가늠해보는 마당이다. 서영은의 소설들을 니체의 철학과 견주어가며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이 시대의 과제에 대한 하나의 시도로 읽어내는 6장(우리는 누구인가: 서영은 문학의 철학적 독해)은 서구의 시대정신이 우리 문학에 미친 영향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짚어보는 장이기도 하다.

3부에서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한국철학자로 김형효와 박이문을 집중 조명한다. 박이문과 김형효가 세상을 떠난 지금, 뒤늦게나마 이 두 거장의 철학을 평가하는 자리이다. 7장(김형효의 노장 읽기)에서는 노장에 대한 김형효의 해체적 독법의 의의와 문제점을 몇 가지 범주로 대별해 구체적이고도 비판적으로 거론하며, 8장(박이문의 철학세계)에서는 박이문의 국문 저술뿐 아니라 영문 저술들을 섭렵하여 그가 전개하는 논지의 결함과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보완한다.

9장(토론과 스케치)에서는 승계호, 이기상, 이진경, 박영식, 최진덕 등 국내외에서 활동해온 대표적 한국현대철학자들의 저술들을 비판적으로 거론하여 이들이 기여한 한국현대철학의 현황을 조망하고 이들 분야들에 대한 국내외 연구의 현황을 점검한다. 10장(대화)은 저자의 인터뷰와 학생들과의 대화가 담긴 장인데, 시대가 철학에 부과하는 사명, 철학의 본령이 기술문명 시대에 굴절을 겪게 되는 과정, 미래의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한국 사회의 당면 문제들과 결부해 하나하나 살펴나간다.

이 책은 대중서나 교양서가 아니라 학술서를 지향하지만, 소수의 해당 전공자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 나아가 문학이나 예술과 같은 인접 분야의 고급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히기를 기대한다. 불통의 전문성만을 고수하다 고립을 자초해 위기에 빠진 한국현대철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의 하나를 이 책이 보여주었기를 희망한다. 대화가 없었던 독백의 한국현대철학을 학술광장으로 이끌어 거기서 공적인 검증을 받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체제를 대화 중심으로 방향 잡은 주된 연유이다.

한 학계가 연구 역량을 축적하려면 선대의 연구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비판적 계승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학계는 늘 해외 학술동향과 같은 외풍에 휩쓸리는 종속성을 탈피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수입된 해외의 학문이 설령 한국에서 어떤 성과를 낸다 해도 그것이 제대로 평가․계승되지 못한다면, 이 또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오류를 반복하게 된다.

이 책에서 나는 절실히 요청되는 우리 학문에 대한 정당한 평가 작업을 수행하려 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선배의 학문에 대한 평가를 넘어 나름의 철학적 비전을 제시하려 했다. 한국에서는 이 두 작업이 서로 연결되는 일이 드물었다. 선행 연구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학문을 개진한다 해도 그것이 어떤 학문적 배경에서 잉태된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이 책은 이러한 오류들을 극복해 우리 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창의적으로 이어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승종 연세대학교·철학

연세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뉴욕 주립대(버팔로) 철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어바인대 철학과 풀브라이트 방문 교수와 카니시우스대 철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같은 대학의 언더우드 국제대 비교문학과 문화 트랙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논리철학적 탐구》,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분석적 해석학을 향하여》, 《동아시아 사유로부터: 시공을 관통하는 철학자들의 대화》, 뉴턴 가버(Newton Garver) 교수와 같이 쓴 Derrida and Wittgenstein(Temple University Press, 1994)과 이를 우리말로 옮긴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 있으며, 연구번역서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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