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캐슬을 뒤흔드는 은유의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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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캐슬을 뒤흔드는 은유의 정치가 필요하다!
  • 나병철 한국교원대학교·국문학
  • 승인 2020.10.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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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문학의 시각성과 보이지 않는 비밀: 시선의 권력과 응시의 도발』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560쪽, 2020.08)

이 책은 『무정』과 「만세전」에서부터 『스카이 캐슬』, 『기생충』, 『사하맨션』에 이르는 100년 동안의 우리 문학과 영화의 시각성에 대한 논의이다. 문학과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불균등성을 드러내며 현실의 시각적 불평등성에 대해 미학적으로 대응한다. 시각적 불평등성이란 사회적 타자가 가난할 뿐 아니라 ‘없는 사람’이나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시각적 불평등성의 폭력은 존재론적 폭력이며 그 목적은 불길한 타자를 추방하고 체제의 지배를 영속화하는 것이다. 문학은 그런 존재론적 폭력에 대항하여 투명인간이 된 타자를 회생시키며 보이지 않는 물밑의 연대를 은유로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물밑의 연대를 증폭시키는 은유적 저항이 문학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발생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3.1 운동과 촛불집회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타자들이 은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폭시키며 권력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3.1운동의 ‘묘지’에서 ‘만세’로의 전환, 촛불집회의 ‘루저’에서 ‘촛불’로의 전위는, 권력의 시각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은유로서의 정치를 보여준다. 묘지 속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메웠으며, 신자유주의 일상에서 사라진 루저들은 촛불로 회생하며 광장으로 돌아왔다. 100년을 전후로 한 두 변혁운동은 시각적 차별에 저항하는 존재론적 반격을 보여준다.

피케티는 극단적 불평등성을 세습 자본주의라고 부르며 지난 100년간의 역사가 U자를 그리는 세습 자본주의의 회귀라고 말한다. 피케티의 세습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한 시각적 불평등성의 사회에 해당된다. 세습 자본주의에서는 상위 10%가 부를 독점할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견고한 캐슬을 구축한다. 그와 함께 가난한 타자는 비천한 존재가 되거나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린다. 마치 U자를 그리듯이 「만세전」에서 발견된 구더기가 『기생충』에서 기생충으로 다시 출현하는 것은 그 점을 보여준다. 신문명과 묘지의 공존은 캐슬과 지하 벙커의 병존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런 시각적 불평등성의 사회에서는 체제가 세습적으로 고착화되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일상이 계속된다.

피케티의 논의에서 빠진 것은 식민지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에서는 피케티가 간과한 식민지와 신자유주의에서의 시각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는 「만세전」의 묘지의 구더기에서부터 『기생충』의 지하벙커의 기생충까지의 흐름을 주목했다. 그 사이에는 이상, 최명익, 김사량, 손창섭, 윤흥길, 하성란, 한강, 조남주 등의 시각적인 소설이 있다. 왜 우리 문학과 영화에서는 경제적 차별에 대항하는 굳센 저항 주체보다 시각적으로 비천한 존재(앱젝트)가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경제적 불평등성에만 주목하면 시각적 불평등성으로 인한 존재론적 차별을 놓치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와 신자유주의에서는 경제적 차별 못지않게 시각적 차별로 인한 타자의 인격적 강등이 매우 중요하다. 시각적 차별은 불길한 타자를 정치적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적 타자가 투명인간이나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면 그 사회는 아무리 불평등해도 별 동요 없이 운행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만세전」이 『기생충』으로 회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100년이 흘렀지만 시각적 폭력에 의한 존재론적 차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식민지의 시각성과 신자유주의의 시각성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식민지에서는 조선인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 후에 경제적 착취를 했기 때문에 무자비한 과잉폭력이 행사되었다. 여기서는 시각적 폭력이 계급적 폭력의 전제조건이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에서의 시각적 차별은 계급적 불평등이 심화된 양극화의 산물이다. 여기서의 시각적 차별은 계급적 차별의 극단화된 정도를 알리는 신호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자본의 폭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상상적인 시각적 차별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상적인 시각적 차별이 ‘구조화된 계급적 차별’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회적 루저는 다시 회귀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부딪힌다.   

그처럼 경제적 차별이 시각적 차별로 전이되는 과정은 미래가 공간적 상상력으로 대체되는 과정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 이제 경제적 불평등성은 스카이 캐슬, 장미빌라, 근린 생활자, 고시원, 반지하, 지하로 서열화된다. 이 공간적 서열화는 시각적 차별인 동시에 같은 구조 안에서의 미래의 소망을 공간화한다. 스카이 캐슬은 장미빌라의 미래이다. 장미빌라는 근린 생활자의 미래이다. 고시원과 반지하 생활자는 캐슬을 꿈꾸는 동시에 그 즉시로 그것의 불가능성에 부딪힌다.

이처럼 미래가 공간적으로 고착화되고 미래의 꿈이 불가능성에 직면하는 사회는 디스토피아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과거에는 행복한 유토피아로 가는 것이 모두가 잘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꿈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유토피아로 다가가는 순간이 다른 곳에서 디스토피아가 나타나는 순간과 짝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캐슬’이 화려해질수록 ‘기생충’의 지하 벙커가 생겨나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지하 벙커의 앱젝트(비천한 신체)는 어떻게 저항이 가능한가. 그동안의 변혁이론에서는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저항의 선봉에 선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루저, 실직자, 난민, 보트피플들은 아무런 무기도 없이 무장해제된 사람들이다. 이 책은 그런 무력화된 상황을 반전시키는 방법으로 앱젝트의 응시와 은유적 정치를 주목했다. 앱젝트는 벌거벗은 생명과는 달리 심연의 응시를 흘려보낸다. 응시의 존재는 『기생충』의 모스부호 같은 비밀교신을 통해 일상의 사람들과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문학과 시집, 현실을 떠도는 은유들은 세월호 사건에서처럼 응시를 증폭시키며 네트워크를 만든다. 그런 응시의 네트워크를 통해 권력의 캐슬을 흔드는 것이 새로운 저항의 신무기이다. 이 새로운 저항은 시각적 차별에 의해 인격적으로 강등된 사람들의 존재론적 반격이다. 실상 묘지에서 만세로 전화된 3.1운동 역시 그 같은 응시의 증폭에 근거한 무저항의 저항이었다. 저항이란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이 아니라 은유적 정치를 통해 물밑의 연대를 생성하며 권력의 캐슬을 뒤흔드는 행위이다. 이제 화염병과 돌멩이 대신 고착화된 캐슬에 맞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춤이 저항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춤이란 캐슬의 은유적 천동설에서 다중적 정치 행성들의 은유적 지동설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 책은 3.1운동에서 촛불집회에까지 이어진 100년의 오래된 신무기로서 그런 새로운 저항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나병철 한국교원대학교·국문학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원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친밀한 권력과 낯선 타자》, 《감성정치와 사랑의 미학》, 《미래 이후의 미학》, 《전환기의 근대문학》,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탈식민주의와 근대문학》, 《영화와 소설의 시점과 이미지》, 《소설의 귀환과 도전적 서사》, 《은유로서의 네이션과 트랜스내셔널 연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문학교육론》(제임스 그리블), 《냉전시대 한국의 문학과 영화》(테드 휴즈), 《문화의 위치》(호미 바바), 《해체론과 변증법》(마이클 라이언), 《중국문화 중국정신》(C. A. S. 윌리엄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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