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75년간 일본이 표상해온 ‘잿더미’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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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75년간 일본이 표상해온 ‘잿더미’ 개념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0.10.04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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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잿더미' 전후공간론 | 사카사이 아키토 지음 | 박광현 외 옮김 | 이숲 | 336쪽

1945년 8월 15일 이후를 일컫는 ‘전후 일본’은 ‘잿더미’에서 시작됐다. ‘잿더미’라는 공간의 이미지는 ‘기원’의 서사를 작동시킨다. 불타고 무너져 골격만 남은 건물, 파편만이 널린 대지, 흔적만 남은 도로. 공중 촬영으로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은 전쟁의 참화를 증언하고 전후 공간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제시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일본인은 이 비참함에서 다시 일어섰다’라는 서사가 반복해서 재생산되고 있다. 이처럼 ‘잿더미’는 일본 사회에서 공백의 기호로서 황폐한 도시 이미지를 매개로 피해자 일본인과 전후 일본의 기원으로 기능해왔다. 이 책은 이 ‘잿더미’라는 이념적 표상이 전후 일본 사회와 문화 예술과 창작 영역에 남긴 흔적을 추적한다.

‘잿더미’라는 표현에는 이전에 존재했던 강대한 어떤 것의 잔해라는 뉘앙스가 있다. ‘제국’이라는, 과거에 존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의 자취가 빚어내는 비장감이야말로 ‘일본인’의 정신적 부흥, 그 밑바탕에 도사린 감정이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상 따위를 구상할 겨를도 없이 불에 타버린 들판을 배회하던 사람들, 그저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우선이었던 사람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했을까.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잿더미와는 다른 공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암시장 같은 공간이며, 거기서 ‘전후 일본’의 공간 내부에서 배제되거나 방치돼온 사람들의 서사가 태어난다.

냉전 구조를 확립해가던 미국의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입장이 뒤섞이던, 그 다변적이고 복층적인 사회 공간이야말로 점령기 일본의 실태였고,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드러내는 암시장은 전후 일본 사회의 ‘파열점’이었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였다. 패전한 일본의 공간은 미국 점령에 따라 곧바로 외부 세계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잔재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옛 제국령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 상태가 집약적으로 드러난 공간이 바로 암시장이었다. 암시장은 과거의 제국주의와 현재의 점령 상태를 연결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단절되고 국제적으로도 단절된 ‘잿더미’라는 전후 일본의 국민적 경관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런 암시장의 위상으로 새로이 제시함으로써 점령기 일본을 냉전기 동아시아의 일부로 파악하는 이 책은 일본의 젊은 학자 사카사이 아키토가 일본의 전후 내셔널리즘을 형성해온 국민적 경관과 국가적 서사의 바탕에 있는 ‘잿더미’ 표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연구서다. 특히 저자는 점령기 일본의 도시 공간을 논할 때 빈번히 거론된 ‘잿더미·암시장 시대’ 영화와 문학작품을 재검토함으로써 이제까지 비평이 되풀이해왔던 잿더미 논리와 국민적 경관의 굴레에서 벗어난 새로운 서사 해석을 시도한다.

과거와의 단절과 피해자성을 의미하는 기호 ‘잿더미’는 전후 일본을 구축하는 데 사용된 ‘국민적 경관’이다. 잿더미는 국가의 형태가 제국 일본에서 전후 일본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라는 국민의 단일성·균일성이라는 허구를 구성하는 매개로 기능했다. 그것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경시하고, 총력전 체제의 지배구조를 존속시킨 제국의 유산을 청산하는 과정 없이 이뤄졌다.

이 책이 이런 국민적 경관의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발견한 것은 그간 일본답지 않다고, ‘일본인’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제돼온 서사다. 1, 2장에서 다루는 영화작품과 영화비평은 실제의 잿더미와 암시장 영상을 담은 작품에서 ‘새로운 일본’을 읽고자 했던 비평 담론의 무능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문학 텍스트 분석을 시도한 2부에서는 ‘전후’의 출발점을 그린 것으로 정전화되거나 전후 민주주의 문학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통해 ‘잿더미’라는 공간의 인식이나 ‘새로운 일본’과의 대면을 벗어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면 과연 어떤 공간과 함정이 드러나는지 살펴본다.

특히 이 책에서 비중 있게 살펴본 재일 조선인 문학이나 그 배경이 되는 민족운동도 마찬가지 서사를 제공한다. 실제로 점령기 일본에서 조선인 작가들이 남긴 작품은 대체로 ‘재일 조선인 문학’이라는 틀에서 전후 문학의 하위 범주로 분류되고, 일본 문학의 다양한 ‘수확’으로 논의돼왔다. 이 책은 특히 점령기 일본을 묘사한 김달수의 소설을 동시대 일본 소설과 같은 무대 위에서 분석함으로써 ‘잿더미’ 서사 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을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통해 구축되는 서사 공간을 ‘전후 일본’의 국민적 경관이라는 굴레에서 해방한다.

번역자는 이 책을 단순히 일본 전후에 대한 저자의 반성적 사유에 공감하거나 편승해서 번역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오히려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분석이 한국의 내셔널리즘과 그 국가적 상상력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데에도 대단히 유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며 새삼스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일국적이고 단선적인 역사 인식에 대한 자기반성이 한국과 일본에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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