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다르게 표현했나, 뮤지컬 〈일 테노레〉와 〈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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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다르게 표현했나, 뮤지컬 〈일 테노레〉와 〈파과〉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4.04.2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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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대극장 창작뮤지컬 제작은 언제나 어렵다. 대극장 뮤지컬 제작에는 거대 자본의 유치 및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기획력과 마케팅, 그리고 관객을 폭넓게 포괄할 수 있는 ‘힘’이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작의 노하우는 매우 중요한데 이는 보통 오랜 시간에 걸쳐 단련된 경험에 바탕을 둔다. 한국 시장은 오랫동안 소위 ‘대극장 배우’로 호명되는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들로 기획의 활로를 찾았으며 이에 따라 작품의 중요도는 배우 라인업과 비중이 비슷하거나 보통 후순위에 놓여왔다. 이런 측면에서 2023년 말에서 2024년 상반기에 공연되고 있는 <일 테노레>¹⁾와 <파과>²⁾는 유의미한 성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1) 대본 박천휴, 작곡 윌 애론슨, 연출 김동연, 제작 오디컴퍼니, 2023. 12. 19~2024. 02. 25,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2024. 3. 29~5. 19,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앵콜공연
2) 원작 소설 구병모, 대본 장혜정·이지나, 작곡 이나영, 연출 이지나, 제작 PAGE1, 2024. 3. 15~5. 26,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노년의 인물과 관조적 정서

두 작품의 가치는 먼저 인물 설정에 있다. 점차 창작뮤지컬의 관심 영역에 들어오고 있는 노년의 인물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웰다잉>,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모두 2016년 초연), <땡큐베리스트로베리>(2018년 초연), <호프>, <안테모사>(모두 2019년 초연)가 노년의 위로와 성장을, <렛미플라이>(2022년 초연)가 노부부의 사랑을 다룬 바 있으나, <일 테노레>와 <파과>는 ‘결여’의 정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노인 인물형을 구축했다. 또한 이런 점에서 노년의 인물을 한국적 정서로 정형화하는 방식과도 다소 거리를 보인다.

<일 테노레>와 <파과>의 극적 현재는 윤이선과 조각의 현재다. 이선과 조각은 인생의 막바지를 향해 가는 노인들이지만 그들은 생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는다. 그들은 젊은 날 사랑했던 진연, 류를 여전히 사랑하며 정신적으로 그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진연과 류는 이미 먼 과거에 죽었지만 그들의 이타적 죽음 때문에 이선과 조각은 각자 자신의 삶을 추동하고 반추하는 모든 일상의 순간에 진연과 류를 놓는다. 따라서 공연은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며 홀로 남은 이들의 현재에 스며들어 있는 과거를 유연한 흐름으로 보여준다. 

 

[일 테노레] 공연사진_1막 2장_ 박은태(윤이선 역), 박지연(서진연 역), 전재홍(이수한 역) 외 (제공. 오디컴퍼니(주))
[일 테노레] 공연사진_ 조선 최초 오페라 클럽_ 서경수(윤이선 역), 홍지희(서진연 역), 전재홍(이수한 역), 브룩 프린스(베커 여사 역) 외 (제공. 오디컴퍼니(주))

진연은 결단력과 행동력에서 이선을 늘 앞섰다. 진연은 이선을 사랑했지만 이선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 청춘들의 꿈이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에 부딪혀 ‘찬란한 흉터’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진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를 바꾸는 것이었고 이 신념에 따라 그녀는 행동하는 독립운동가로서 죽는다. 이선은 이런 진연을 가슴에 품는다. 그는 항상 소리를 죽이며 살아야 했던 조선인 청년이자, 독립운동가인 형이 죽어 부모에게 ‘더 좋은 아들’이 되고자 했던 착하고 소심한 청년이었다. 그는 ‘오페라 테너’라는 꿈을 찾아 과거의 자신에게서 벗어났지만, 진연과 함께 오페라를 통한 독립운동을 도모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그 꿈이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이선의 인생 전체를 감싼다. 그는 현재 오페라 극장이 가깝게 보이는 뉴욕에 살고 있으며 동양인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테너가 되는 쾌거를 이뤘지만, 자신의 삶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페라는 여전히 일반 대중들과 멀고 자신은 그런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 테노레>는 이 흐름 속에서 이선의 마지막 순간을 공연의 하이라이트로 만든다. 바이올린 솔로가 마지막 음을 연주하는 순간 공연의 모든 호흡은 멈추고 이선은 무대에서 사라진다. ‘꿈 꾸는 자’의 모든 목적에서부터 벗어나 망각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백발 노인 이선의 뒷모습은 처연하고 자유롭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공연의 리듬은 쓸쓸하고 조용하며, 떠들썩하거나 과장되어 있지 않다. 이 마지막 장면은 <일 테노레>의 미학적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일 테노레] 공연사진_ 됐는가, 그럴 각오_ 최호중(최철 역) 외 (제공. 오디컴퍼니(주))
                                                     [파과] 공연사진 (자료제공: PAGE1)

<파과>의 조각에게 류는 선생이자 애인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조각이 불행한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게 한 것은 류였다. 우연히 흘러들어온 미군 클럽에서 만난 류는 조각에게서 본능적인 킬러 본능을 발견하고 그녀를 냉정한 킬러로 육성시킨다. 류는 가장 효과적인 살인 방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법을 또한 강조한다.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라’는 그의 가르침은 인간적인 감정을 멀리하고 목표에만 집중하라는 절대적인 규율로 조각에게 자리 잡는다. 이로써 조각은 손톱이라 불리는 최고의 여성 킬러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류는 조각을 ‘지키다’ 죽는다. 조각은 그런 류를 가슴에 품고 ‘현재’를 살며 점차 더욱 노쇠해가는 자신을 그나마 ‘지킨다’. 

<파과>의 초점은 노년의 조각이 인간적인 감정을 갖기 시작하며 삶을 확장된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다. 이는 킬러-조각의 정체를 알면서도 언제나 그녀에게 우호적인 강박사를, 조각이 류와 같은 ‘느낌’으로 좋아함으로써 시작된다. 조각은 점차 강아지 ‘무용’을 키우며 동물과 소통하고, 화목한 강박사 가족을 흠모하며, 가장 까다로운 청부살인을 바로 앞두고 가난한 노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된다. 이런 조각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삶의 ‘조각’은 20년 전 청부살인 현장에서 살아남은 투우다. 투우는 손톱 시절의 조각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아이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살인 현장에서 조각에게 묘한 사랑을 느낀다. 투우는 가사도우미로 위장한 조각이 자신에게 알약을 정성스럽게 먹이는 순간 찰나적이지만 지극한 모성을 느낀다. 조각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그에게 트리거가 되어 성적인 욕망마저 자극한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재한 모성과 섹슈얼리티의 감각은 투우 인생 전체를 광기에 찬 욕망으로 감싼다. <파과>의 마지막 순간은 투우가 조각에게 품었던 욕망의 조각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조각이 과거와 이별하는 장면을 담는다. 조각의 손톱에 장식된 비즈와 매니큐어에 과거는 흔적으로 남고, 조각은 삶의 상실을 비로소 수용함으로써 생의 빛나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희망한다. 조각의 덤덤한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 깊은 한도, 극한의 욕망도 아닌, 조용한 관조적 태도로 마감된다. 

 

                                                     [파과] 공연사진 (자료제공: PAGE1)
                  [일 테노레] 공연사진_ 새로운 세상_ 서경수(윤이선 역) 외 (제공. 오디컴퍼니(주))

오페라와 여성 느와르 액션물

이렇듯 새로운 미감으로 정리된 인물과 정서뿐만 아니라, 두 작품은 스타일의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어 또한 주목된다. 사실 <일 테노레>는 양식적 측면에서 브로드웨이 황금기 뮤지컬과 닮아있다. 음악이 장면을 진행시키고 안무로 스토리텔링을 보여줌으로써 장면 하나하나가 각각 완결성을 갖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서사와 긴밀하게 결합된 넘버 중심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은 공연을 익숙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보통 창작뮤지컬은 서사의 논리적 연결로 장면을 풀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 테노레>의 황금기 스타일은 유니버설하면서도 독특하게 보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 테노레>의 넘버다. 윌 애론슨의 서정적 넘버들은 공연의 모든 정서를 만들고 이끌며 완성시킨다. 특히 공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오페라 스타일의 넘버들은 극의 서사와 넘버 사이의 결을 맞추고 오페라 실연 장면들에 극적 심도를 더한다. 극중극 오페라 <꿈 꾸는 자들> 넘버인 ‘꿈꾸는 자들 1막 1장’, ‘Aria 1: 꿈의 무게’, ‘Aria 2: 그리하여, 사랑이여’는 다양한 버전으로 변주되며 극중극 안팎의 서사를 함축시키는데, 이러한 넘버의 활용은 이선과 진연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주플롯과 안토니오와 나탈리아의 극중극 플롯을 결합시켜 공연에 메타성을 더한다. 극중극과 주플롯이 하나로 융합되어 ‘꿈 꾸는 자들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공연 전체를 묵직하게 울린다. 이러한 해법은 뮤지컬이 오페라적인 것을 지향함으로써 고급 예술과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 아니라, 뮤지컬이 오페라의 문법을 활용함으로써 양식의 확장을 일으킨 결과를 낳는다. 

 

   [일 테노레] 공연사진_ 꿈꾸는 자들_ 1막 1장(부민관 심사 Ver.)_ 서경수(윤이선 역) 외 (제공. 오디컴퍼니(주))
                                                     [파과] 공연사진 (자료제공: PAGE1)

<파과>는 느와르 액션물로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여성’ 느와르 액션물이다. 노년의 조각과 과거의 조각이 완성하는 강도 높은 액션 장면들은 공연의 초점을 확실하게 만든다. 특히 조명 효과와 결합하여 ‘슬로우 액션’으로 구사된 장면들은 마치 영상물처럼 인지된다. 이는 철제 무대 전체를 무대영상의 스크린처럼 활용하여 무대와 영상을 적극 결합한 멀티미디어 무대 안에서 효과를 더욱 극대화했다. 

느와르 액션의 미학은 원작 소설을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활용함으로써 더 힘을 받는다. 공연은 ‘아이 엠 송’과 ‘아이 원트 송’ 계열의 캐릭터 송을 비교적 많이 썼는데, 여기에 조각과 투우의 내레이션이 더해져 인물의 내면을 매우 세밀한 지점까지 포착했다. 공연 전체가 마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 인물의 심리를 밀착시켜 담아냈다. 미리 녹음된 조각과 투우의 내레이션은 서사와 심리의 흐름을 미세하게 잡아 덤덤한 어조로 공연을 완성시켰는데, 이는 ‘느와르’의 톤 안에서 정리되어 있었다. 원작 소설과 비교한다면 정서가 과장된 편이었고 뮤지컬 자체로서는 어두운 색채를 유지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완벽한 공연은 어렵지만, 가치 있고 좋은 공연은 있다. <일 테노레>와 <파과>는 대극장 뮤지컬들이 한류와 글로벌 비즈니스 열기에 힘입어 내실을 다지기도 전에 무대에 올라갔던 과거의 역사를 상당 부분 극복한 2024년의 모델들이다. 하려는 이야기를 명확한 스타일에 담아 완성시킨 두 공연에서 한국 뮤지컬의 가능성을 읽는다. 곧 초연될 뮤지컬 <천 개의 파랑>(원작 천선란, 대본/작사 김한솔, 작곡 박천휘, 연출 김태형, 제작 서울예술단, 2024. 5. 12~26,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은 뮤지컬의 다양성 화두를 더욱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되며,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주목될 필요가 있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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