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변화는 정치 지형의 변화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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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변화는 정치 지형의 변화를 초래한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8.27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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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한 혁명: 탈물질주의 가치의 출현과 정치 지형의 변화 | 로널드 잉글하트 지음 | 박형신 옮김 | 한울아카데미 | 536쪽

 

로널드 잉글하트의 이 책은 1977년 출간된 정치사회학의 근대적 고전이자 명저이다. 이 책은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초반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며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유럽과 미국 사회가 겪은 의식의 변화를 연구한 것으로, 저자 잉글하트는 문화적 변화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주된 가치가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전환되었음을 간파하고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고 칭했다. 저자는 이러한 가치 전환이 정치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되었다고 설파한다. 

이 책은 광범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가치 변화의 양상과 더불어 가치 변화로 인해 정치 지형도 변화했음을 입증한다. 대규모 조사를 통해 잉글하트는 당시 서유럽과 북미의 젊은 세대는 자기표현과 삶의 질을 강조하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는 경제적·신체적 안전을 중시하면서 물질주의적 가치를 보였던 그들의 부모 및 조부모 세대와는 달라진 양상이었다. 

잉글하트는 이처럼 개인의 가치가 변화한 데에는 교육 수준 향상, 직업구조 변화 같은 일련의 사회경제적 변화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45년 이후 서구 국가가 장기간 풍요를 누리고 전쟁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탈물질주의적 가치가 출현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부유한 ‘개인’이 아니라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였던 것이다.

잉글하트는 탈물질주의적 가치가 출현하면서 정치의 초점이 경제 위주의 산업적 쟁점에서 라이프스타일 위주의 탈산업적 쟁점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질에 대한 관심이 저하되면서 이데올로기, 민족성, 생활양식 등이 점차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잉글하트는 신분 정치, 문화정치가 번창하고 계급정치는 점차 쇠퇴할 것으로 전망한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정치 갈등을 이루는 사회적 기반이 변화함에 따라 정치적 저항 세력 역시 새로운 세력으로 대체되는데, 이 새로운 저항 세력이 바로 탈물질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비교적 부유한 계급이다. 따라서 좌파정당은 이러한 신중간계급으로부터 새로운 지지를 확충하는 반면, 현상을 유지하는 정당은 점점 더 부르주아지와 전통적인 중간계급 및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측한다.

잉글하트는 중간계급 급진주의가 경제적으로 부유한데도 불구하고 왜 현실의 변화를 추구하는가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시한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달리 서구 국가들의 관습과 제도가 여전히 물질주의적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데 불만을 품고 있다. 따라서 탈물질주의자들은 기존의 질서를 틀 지은 엘리트에 대해서도 저항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잉글하트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면 탈물질주의적 급진주의가 급속히 확대될 것이고 탈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이 확산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구조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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